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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전설

평정공노촌이선생(平靖公老村李先生)의 간추린 년보(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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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00회 작성일 19-07-0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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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공노촌이선생(平靖公老村李先生)의 간추린 년보(年譜)

1416년 음6월2일  선생께서 탄생하시니 휘는 약(約)자 동(東)자 이시고 자는 춘보(春甫)이시며 호는 노촌(老村)이신데 부친은 벽진 이씨 시조 벽진장군의 16세인 증호조판서공[휘=덕(德)자 손(孫)자]이시고 모친은 증정부인 고흥 류씨 사이에 일남육녀(一男六女)중 막내이시다. 선생의 부모께서 늦게까지 딸만 낳으시고 아들을 낳지 못하시어 부모가 함께 금오산약사암(金烏山藥師庵)의 기도를 드린 후에 선생을 낳으셨으므로 아명을 약동(藥童)이라 했다가 훗날 약동(約東)으로 고쳤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유년기에서부터 청년기에 강호김선생[江湖金先生, 휘=숙자(叔滋)]에게서 수업하시며 일향(一鄕, 한고을)에 사시던 점필재김선생["佔畢齋金先生, 휘=종직(宗直)]과 매계조선생[梅溪曹先生, 휘=위(偉)]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결의(結義)하여 교분(交分)하셨다고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실기년보(實記年譜)에 기록 되어 있다.

1441년(선생26세) 2월  진사입격(進士入格) 제삼등이십칠명(第三等二十七名)
정간공경은이선생[靖簡公耕隱李先生, 휘=맹전(孟專)=생육신중에 한분]의 기록에 “선생은 강호김선생(江湖金先生)과 점필재김선생부자("佔畢齋金先生父子)와 상련하접(上連下接)하며 도의(道義)를 갈고 닦으므로 그 덕업(德業)을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1448년(선생33세) 7월1일  시강입격(試講入格) 특제장사랑[特除將仕郞, 종구품품계(從九品品階)] 선산교도(善山敎導)
그때에 향숙(鄕塾)의 교수(敎授)를 임명하는 일이 중하였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제수(除授)한 것이다. 살펴보니 선산향교루벽(善山鄕校樓壁)에 제액(題額)된 시(詩)가 있는데 경오년(庚午年, 1450년)에 교수(敎授)의 시구(詩句)라 하니 선생이 무진년(戊辰年)부터 신미(辛未)년 까지 교도(敎導)로 재임일 때에 일이며 기사년(己巳年, 1449년) 12월7일에는 품계(品階)가 종사랑[從仕郞, 정구품(正九品)]으로 올랐다.

1451년(선생36세) 2월9일  품계(品階)가 승사랑[承仕郞, 종팔품(從八品)]으로 올랐고 3월15일에는 증광문과정과제십인(增廣文科丁科第十人)으로 등과(登科)하시여 계공랑[啓功郞, 종칠품품계(從七品品階)]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 종칠품직(從七品職)]이 되시었으며 4월15일에는 안동교도(安東敎導)에 제수(除授)되셨다가 10월6일에 특별히 성주교도(星州敎導)로 이임(移任)을 하셨는데 이는 임금이 선생의 연로한 부모가 아프셨으므로 가까운 곳에서 편히 살펴보라고 배려한 때문이다. 다음해인 임신년(壬申年, 1452년)10월1일에는 품계(品階)가 무공랑[務功郞, 정칠품(正七品)]으로 오르시었다.

1453년(선생38세) 4월20일  선무랑[宣務郞, 종육품품계(從六品品階)] 성주교수[星州敎授, 종육품사직(從六品司職)]로 되시니 3년간을 성주(星州)에 재임하시며 하로촌(賀老村)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피셨다.

1454년(선생39세) 8월26일  선교랑[宣敎郞, 종육품품계(從六品品階)]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육품사직(正六品司職)]이 되시었다가 12월20일에 황간현감[黃澗縣監, 종육품사직(從六品司職)]에 제수(除授)되시어 1455년6월23일에는 품계(品階)가 승훈랑[承訓郞, 정육품(正六品)]으로 오르시고 동년 8월19일에는 다시 품계(品階)가 승의랑[承議郞, 정육품(正六品)]이 되시고 1457년1월18일에는 품계(品階)가 봉훈랑[奉訓郞, 종오품(從五品)]으로 오르시었는데 재임(在任)은 황간(黃澗)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이르기를 정사(政事)의 청간(淸簡)하시었다 하였다.

1458년(선생43세) 2월18일  품계(品階)가 봉직랑[奉直郞, 종오품(從五品)]이 되시며 유장(儒將, 선비출신의 장수)으로 천거(薦擧) 되시고 동년 9월23일에는 특별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오품사직(正五品司職)]으로 벼슬자리가 옮겨 내려지시고 동년 11월18일에는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정오품사직(正五品司職)]이 되시었다.

1459년(선생44세) 4월3일  품계(品階)가 통선랑[通善郞, 정오품(正五品)]으로 오르시고 동년 7월3일에 청도군수[淸道郡守, 종사품사직(從四品司職)]로 제수(除授)되시어 선생이 46세인 1461년11월 체임(遞任)되시어 고향집으로 돌아오실 때 까지 재임(在任)하시었고 동년 12월4일에는 품계(品階)가 조봉대부[朝奉大夫, 종사품(從四品)]로 오르시었다.

1462년(선생47세) 1월  선생의 모친이신 증정부인고흥유씨(贈貞夫人高興柳氏)께서 별세(別世)하시어 선생49세인 1464년4월에 복결(服闋)을 할 때까지 삼년거상(三年居喪)을 하시었다.

1464년(선생49세) 9월9일  선략장군용양위부호군[宣略將軍龍驤衛副護軍, 무관종사품계사직(武官從四品階司職)] 겸선전관(兼宣傳官)이 되시다.

1465년(선생50세) 7월13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종삼품사직(從三品司職)]에 제수(除授)되시고 다음해 1월14일에 건공장군[建功將軍, 종삼품무관품계(從三品武官品階)] 부호군(副護軍)이 주어지고 5월27일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삼품당하무관품계(正三品堂下武官品階)] 부호군(副護軍)이 주어지다.
1466년(선생51세) 7월25일  통훈대부종부시정[通訓大夫宗簿寺正, 정삼품문관당하계사직(正三品文官堂下階司職)]이 되시었다가 동년 8월10일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정삼품무관당상품계(正三品武官堂上品階)]행[行, 행수법에 의한행(行)]호군(護軍)에 제수(除授)하며 특별히 오위장[五衛將, 종이품사직(從二品司職)]이 겸직(兼職)으로 주어지었다가 동년 1월15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삼품문관당상품계(正三品文官堂上品階)]구성부사[龜城府使, 종삼품사직(從三品司職)]로 제수(除授)되시다.

1468년(선생53세)  구성부사임기(龜城府使任期)를 마치고 돌아오시다.

1470년(선생55세) 8월27일  제주목사[濟州牧使, 정삼품사직(正三品司職)]로 제수(除授)되시어 1472년(선생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셨는데 임기중에는 도민들이 겨울에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가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있으므로 피해가 극심(極甚)함으로 노고를 줄여주고자 한라산 정상에 있던 산신제단(山神祭壇)을 산 밑으로 옮기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상소(上疏)를 올려 나라의 허락을 받아 산신제단(山神祭壇)을 산 아래 민가(民家, 현 곰솔공원) 가까운 곳으로 옮겨 도민들의 노고를 덜어 주시여 송덕을 받으시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실 때에 도민들이 선생이 애민하심에 보답하고자 의복(衣服)과 제구(諸具)를 준비하여 드리니 모두다 관부(官府)에 쌓아두었다가 도민을 위하여 쓰라 하시고 필마(匹馬)로 오시다가 성문에 이르러 손에 말채찍이 있음을 생각 하시고 이것 또한 관물(官物)이다 하시고 문루(門樓)에 걸어 놓으시고 오셨으므로 세월이 오래 되어 채찍이 썩어 떨어지니 읍인(邑人)들이 그 곳에 그  흔적(痕跡)을 그려 우모(寓慕)하였고 또 바다를 건너올 때에 바다 가운데서 홀연히 배가 빙글빙글 돌면서 기울고 위태(危殆)한 때에 선생께서는 놀라지 않으시고 엄숙하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행중(行中)에 혹시라도 사물(私物)을 받친 것이 있어서 신명(神明)이 나를 깨우치고자 이러는 것 같다 하시니 비장이 아뢰기를 고을사람들이 선생께서 유장(儒將)으로 천거(薦擧)되셨으므로 한 벌의 갑주(甲胄)를 드려 선생이 갑주를 입으시도록 대접하고자 하나 선생이 아시면 반드시 물리치실 것이 두려우니 감추어 줄 것을 부탁하므로 좁은 마음으로 바다를 건너간 후에 고(告)하려고 덮어서 숨겨 놓았다 하므로 선생께서는 이는 모두가 내가 빙옥(氷玉)같이 깨끗하고자 힘써 왔는데 이것이 있으니 강신(江神)이 그렇지 아니함을 알고 이와 같은 특이한 일에 이르게 되었다 하시고 사실을 고(告)한 후에 명(命)하여 갑주를 바다에 던지게 하니 이내 파도가 안정(安定)되어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인하여 주인(州人)들이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이름하고 선생 생전에 사당(祠堂)을 세워 영혜사(永惠祠)라 하며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여 조선말기까지 이어지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1473년(선생58세) 5월20일  절충장군[折衝將軍, 무관정삼품품계(武官正三品品階)]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문관정삼품사직(文官正三品司職)]가 되시었다.

1474년(선생59세) 6월27일  상호군[上護軍, 무관정삼품직(武官正三品職)]이 되시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무관정삼품사직(武官正三品司職)]로 제수(除授)되시니 점필재김선생["×畢齋金先生, 휘=종직(宗直)]이 송별(送別)하며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하방시례위융율호이은위정해수[何妨詩禮爲戎律好以恩威靖海陲, 시서예문(詩書禮文)에는 군자(君子)이고 군율(軍律) 또한 엄숙(嚴肅)하니 마땅히 바닷가 변방(邊方)이 편안(便安)할 것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묘당약요조원자시론응귀독립군[廟堂若要調元者時論應歸獨立君, 묘당(廟堂)에서 만약 요인(要人)으로 으뜸인 사람을 뽑는다면 시론(時論)이 응당 선생에게 집중(集中)되어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다음해인 1475년(선생60세)에 체직(遞職)되시었고 1476년(선생61세) 7월1일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시었다.

1477년(선생62세) 2월21일  특별(特別)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이품품계(從二品品階)]로 승차(地差)되시고 그해 여름에 천추사(千秋使)로 중국(中國)에 다녀오시고 그해 12월12일에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문관정삼품사직(文官正三品司職)=사간원수장(司諫院首長)]이 되시었는데 당시에 군현(羣賢)이 많은 시(詩)를 지어 찬미(讚美)하였는데 문충공(文忠公)인 사가서공[四佳徐公, 휘=거정(居正)]은 “소대당당언로개간관금복득현재[昭代堂堂言路開諫官今復得賢才, 밝은 시대(時代)에 언로(言路)를 열어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일할 간관(諫官)을 이제야 현재(賢才)로 다시 얻었다]” 하였고 충정공(忠貞公)인 휴휴당홍공[休休堂洪公, 휘=응(應)]은 “포장대책진봉사탄진충언근어연[鋪張大策進封事彈盡忠言近御筵, 나라에 큰 정책을 세워서 올리고 임금을 가까이에서 뫼시며 충성(忠誠)을 다할 것이다]” 하였다.

1478년(선생63세) 9월24일  경주부윤[慶州府尹, 종이품사직(從二品司職)]으로 제수(除授)되시어 삼년(三年)을 재임(在任)하시었다.

1481년(선생66세) 7월4일  상호군(上護軍)이 주어지고 그해 11월15일에 사복시장(司僕寺將)이 겸직(兼職)으로 내려지고 그해 12월13일에는 또다시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겸직으로 주어지었다.

1483년(선생68세) 2월13일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시었다가 3월5일에 동지중추부사겸사복장(同知中樞府事兼司僕將)이 내려지었다.
1484년(선생69세) 6월1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겸직(兼職)되셨다가 그해 10월5일 동지겸부총관(同知兼副摠管)이 내려지었다.

1486년(선생71세) 5월26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제수(除授) 되시다.

1487년(선생72세) 5월23일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의 벼슬이 내려지고 그해 12월14일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의 벼슬이 내려지었다.

1488년(선생73세)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시었다. 그 년월(年月)이 상세(詳細)하지 않으나 이조(吏曹)의 소재청백록(所載淸白錄)에 선생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입선(入選)되시었으므로 이때이었을 것이다.

1489년(선생74세) 5월9일  특별히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계(陞階) 되시고 개성부유수(開城副留守)에 제수(除授)되시었다.

1490년(선생75세) 7월21일  특별(特別)히 자헌대부[資憲大夫, 정이품품계(正二品品階)]로 승계(陞階)되시어 병이 있음을 이유로 사직(辭職)을 청하였으나 그해 10월6일에 특별히 벼슬자리를 옮겨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이품사직(正二品司職)]의 벼슬이 내려지고 기로사(耆老社)에 입참(入叅)하라 하였다.

1491년(선생76세) 1월  연로(年老)하였으므로 치사(致仕)하여 주실 것을 애걸(哀乞)하여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아 하로촌(賀老村)으로 퇴거(退居)를 하시었다 조교관[曹敎官, 휘=신소(伸謏)]의 문록(聞錄)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노년에 인퇴(引退)하시어 사시는 곳은 넉넉히 노닐 수 있는 곳인 해 돋는 고향(故鄕)으로 그곳은 태어나고 마칠 곳이라 청백(淸白)한 덕행(德行)은 선비가 바라는 바이니 선생의 일생을 앙모(仰慕)한다” 하였다.

1493년(선생78세) 음(陰)6월13일  하로촌정침(賀老村正寢)에서 고종(考終)하시어 그해 8월에 금산군묵방산선조소감공묘하건좌(金山郡墨坊山先祖少監公墓下乾坐) 언덕에 안장(安葬)을 하였다.
동년 9월14일에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를 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타고난 자질(資質)은 단아하면서도 근엄하며 성품은 순결(純潔)하고 정직하여, 백리밖 외지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림에 치적(治積)이 제일이요,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풍속을 교화하고 인애(仁愛)로 백성을 구휼함이 그 마음에 이감(梨甘)과 부용(芙蓉)같아라. 일찍이 미원[薇垣, 사간원(司諫院)의 별칭(別稱)]대사간(大司諫)일 때 고비 때마다 진실(眞實)로 격려(激勵)와 보익(補益)을 받았는지라, 이를 가상히 여겨 곧 벼슬에 품계(品階)를 높이려 하였는데, 하늘이 어찌 돌보지 아니 하시고 이와 같이 망극(罔極)한 지경(地境)에 이르게 하니, 경(卿)의 부음(訃音)을 듣고 한탄스럽고 애석(哀惜)한 마음 금(禁)할길 없다.” 하였다.
동년 10월18일에 나라에서 평정공(平靖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시법(諡法)은 집사유제왈평[執事有制曰平, 정사(政事)를 집행(執行)함에 절제(節制)가 있어 평(平)이라함]과 유덕안중왈정[柔德安衆曰靖, 유화(柔和)한 덕행(德行)으로 여러 사람을 편안(便安)하게 함을 정(靖)이라함]이다.

1648년(선생몰후155년)  당시 사림(士林)의 방성(方盛)한 논의(論議)가 선생의 도학(道學)은 사림영수(士林領袖)이시므로 영남(嶺南)의 하로촌이 선생의 악강지지(嶽降之地)인데 그곳에 서원(書院)을 건립(建立)하여 봉향(奉享)함이 옳다하고 금산군 원동(院洞)에다가 일을 성사하여 경렴서원(景濂書院)으로 편액(扁額)하고 선생의 봉향(奉享)을 시작하였다.

1673년(선생몰후180년) 4월경렴서원(景濂書院)을 군내(郡內)의 자양산(紫陽山)으로 이건(移建)을 하고 이원(移院)을 한 후(後)에 점필재김선생["佔畢齋金先生, 휘=종직(宗直)]과 매계조선생[梅溪曹先生, 휘=위(偉)]과 최문혜공[崔文惠公, 휘=선문(善門)]과 김절효공[金節孝公, 휘=시창(始昌)]을 추배(追配)하여 봉향(奉享)하였다.

1723년(선생몰후230년) 12월  선생의 묘도(墓道)에 신도비(神道碑)를 곧게 세웠는데 선생의 덕행(德行)은 일세(一世)의 백대종사(百代宗師)로 추대(推戴)함이 옳을 터인데 묘(墓)의 얼굴이 감추어지고 숨기어 있으니 비록 멀고 오래된 일일지라도 그 뜻이 혹시라도 끊어진다면 옳지 아니하고 선생으로 부터 태어나 유의(遺意)를 계승하는 후손이 감히 미적미적하고 말일이 아니라 팔세손인 대사헌치사봉조하세근(大司憲致仕奉朝賀世瑾)이 비명(碑銘)을 찬(撰)하고 부사세윤(府使世玧)이 서(書)하고 지돈녕부사효헌공세환(知敦寧府事孝獻公世瑍)이 전(篆)하였다.

1845년(선생몰후352년) 3월24일 선생의 악강지지(嶽降之地)에 노촌당(老村堂)을 건립(建立)하는 상량(上樑)을 하였는데 하로촌은 곧 선생의 유지(遺址)이므로 사손(嗣孫)이 구지(舊址)를 세수(世守)하고 있었는데 후세가 선생의 유허(遺墟)를 알지 못함은 옳지 아니하다 하고 사손(嗣孫)과 족인(族人)들이 상의(相議)하여 구지(舊址)에 노촌당을 영건(營建)하며 외예(外裔)인 대사헌김정균(大司憲金鼎均)이 상량문(上樑文)을 찬(撰)하고 기계인유화주(杞溪人兪華柱)가 서(書)하여 상량(上樑)을 하고 외예(外裔)인 이조참의이석(吏曹參議李土奭)이 노촌당기(老村堂記)를 지었다.

1846년(선생몰후353년)가을에 선생의 유허비(遺墟碑)를 노촌당(老村堂)의 왼쪽 수무허(數畝許)에 곧게 세웠는데 그해 4월에 외예(外裔)인 제주홍직필(祭酒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찬(撰)하고 외예(外裔)인 참의이석(參議李土奭)이 서(書)하였다.

1848년(선생몰후355년)  봄에 노촌선생당기(老村先生棠記)를 간행하였는데 선생의 문집이 병선(兵燹)에 허물로 남아있지 않고 다만 선생현손인 교관희선(敎官喜善)이 수집(收輯)하여 놓은 육수(六首)의 시(詩)뿐인지라 교관(敎官)의 구세손인 승악(承岳)이 방증(傍證)이 될 만한 모든 서책과 선생의 유적비갈(遺績碑碣)과 과방(科榜)과 원위(院位)와 청백록(淸白錄) 및 지구창수(知舊唱酬) 등의 문자를 모아 편집하여 학준(學峻)과 승익(承翼)과 더불어 성(城)의 동쪽 봉국사[奉國寺, 약사암(藥師庵)에서 활자(活字)로 170책(冊)을 인출(印出)하였는데 외예(外裔)인 제주홍직필(祭酒洪直弼)이 서문(序文)을 짓고 외예(外裔)인 호조참판홍기섭(戶曹參判洪耆燮)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1865년(선생몰후372년)  나라에서 전국(全國)의 서원(書院)을 철폐(撤廢)하라는 명(令)을 내려 경렴서원(景濂書院)이 훼철(毁撤)되니 선생의 향사(享祀)를 봉향(奉享)하지 못하게 되었다.

1980년(선생몰후487년)  지난 이백여년동안 유림(儒林)들이 봉향(奉享)을 이어오던 선조(先祖)를 불사(不祀)함은 옳지 아니하고 후손의 도리가 아니므로 선생의 봉향(奉享)을 위하여 노촌당경내(老村堂境內)에 사우(祀宇)를 건립하자는 종론(宗論)을 취합(聚合)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1년에 선생의 유택(幽宅) 옆에 있던 묘각(墓閣)을 노촌당전정좌(老村堂前庭左)로 이건(移建)하여 동재(東齋)로 하며 염수료(念脩寮)라 제액(題額)하고 서재(西齋)는 신축(新築)을 하여 필유재(必有齋)라 제액(題額)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 하였다.

1983년(선생몰후490년) 10월5일  노촌당경내의 유허비동수무허(遺墟碑東數畝許)에 사우(祠宇)를 신축하여 준공하였다.

1984년(선생몰후491년) 3월  사우(祠宇)를 청백사(淸白祠)로 제액(題額)하고 노촌당(老村堂)을 제액하여 하로서원(賀老書院)으로 제액(題額)하며 경렴서원(景濂書院)을 창건(創建)하였을 때와 같이 노촌이선생만을 봉안(奉安)하고 음삼월초정일(陰三月初丁日)을 정일(定日)로 하여 유림봉향(儒林奉享)으로 향사(享祀)가 다시 시작되었다.

2016년(선생몰후523년) 1월  당년은 선생 탄강육백주년(誕降六百週年)이라서 춘향(春享)을 평정공노촌이선생탄강육백주년기념제(平靖公老村李先生誕降六百週年紀念祭)로 봉향(奉享)하고 평정공노촌이선생탄강육백주년기념전서(平靖公老村李先生誕降六百週年紀念全書)를 간행하는 일과 노촌이선생유적을 문화재로 등록시키는 일등을 추진(追進)하는 평정공노촌이선생기념사업회(平靖公老村李先生紀念事業會)를 결성하기로 하고 우선봉향준비위원(優先奉享準備委員)을 선정하여 위원들이 김천문화원(金泉文化院)과 공동주관으로 김천시장(金泉市長)을 비롯한 관계인사와 김천시관내에 있는 삼향교[三鄕校, 김산(金山), 지례(知禮), 개령(開寧)]의 전교(典校)가 모두 참배(參拜)하는 유림제현(儒林諸賢)과 벽진이씨대종회장(碧珍李氏大宗會長)을 비롯한 족인(族人)들과 노촌선생후손들과 관내학생 등 칠백오십여인이 참배봉향(參拜奉享)하는 대성황(大盛況)을 이루고 제향후 이약동청백리백일장을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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