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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백리 후손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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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원 댓글 0건 조회 93,509회 작성일 20-02-04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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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기념사업회자유게시판글
 
 어느 청백리 후손의 단상

                        李鶴源: 35세,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한국DMZ교육연구소 소장
                                 


나는 시조 벽진장군의 35세 자손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낙동이고, 평정공(平靖公)파의 판서공파  창랑수 도유(滄浪叟 道由: 22세)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아버지 함자는 선한(善翰)이고, 자는 한호(漢鎬)이시다. 나는 철이 들기 전까지 벽진이씨 가문과 조상에 대하여 읽고 들은 바가 전연 없었다. 단지 증조할머니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등에 업고 다니시면서 들려주신 몇 마디 말씀이 있었다.

“ 원아, 네 성은 벽진 이가다, 대장군 파다, 본은 자두 영산이고, 청백리 자손이다.” 증조할머니께서는 약주를 좋아하셔서 기분만 좋으시면 나를 업고 다니시며, 기회 있는 대로 되풀이 말씀을 하셨던 집요함이 대단한 어른 이셨다. 그러나 어리고 철부지였던 나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연 모르고 지냈다. 할머니께서 업어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라 건둥건둥 앵무새처럼 따라만 하면 증조모님께선 좋아 하셨다. 후에 알고 보니, 나는 고조부(應和)•증조부(愚東)•조부 (夏中) 3대조께서 모두 30~40대 초반에 일찍 돌아가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증조모님 등에 많이 업혀 지낸 것은, 내 어머니가 19세에 시집와 20세에 나를 낳고, 21세에 생후 9개월 된 나를 두고 두 할머니 보다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시는 집안에서 할머님으로 부터 집안 내력과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쌍과부 할머니 중 증조모님은 요새 말로 하면 의식이 좀 있으신 어른이셨다. 조손인 나에게 동네 젖을 얻어 먹이려 업고 다니시면서도 평생 잊어버리지 않도록 중단 없이 조상에 관한 교육을 계속해 오신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철이 좀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증조모님의 가르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증조모님께서 청백리 자손이란 사실을 끝 부분에 넣어 왜 그렇게 강조를 하셨는지 증조모님의 진심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 가족이 청백리 자손이라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간다면 그 청백리 자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더 이상 청청백백할 수 없을 만치 가난하게 살아가시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괜히 화가 났다.

내 조상 중에 누가 청백리였는지, 청백리란 것이 얼마나 높은 벼슬자리 인지, 청백리 자손이란 것을 증조모님께서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을 하셨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몰랐고 그리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으로 내 나름대로 청백리란 개념을 정리하였다. 능력이 없어서 한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을 나라에서 불쌍히 여겨 죽은 후에 내리는 벼슬일 것이라고.

많은 세월이 흘러 대학에 들어가서야 청백리를 바로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관리들 중에 청렴결백한 자를 골라 의정부와 육조 경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장들이 논의 추천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 선정되는 가장 청렴한 벼슬아치들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조선시대 44개 씨족 중에서 218명만 배출 되었고, 청백리가 된 개인은 높은 자리의 벼슬길도 탄탄대로로 열려 있었으며, 그의 직계 후손들까지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청백리를 배출한 가문의 영광과 자랑은 물론 그가 태어난 향토에서도 자랑스러운 유명 인물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증조모님께서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신 청백리 할아버지의 실명이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 17세손) 할아버지란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를 춘보(春甫)라 했고,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으며, 돌아가신 후 나라에서 평정(平靖)이란 시호를 내려 그 후손들을 평정공파(平靖公派) 자손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그 당시 처음 알았다. 노촌 할아버지가 경상도 김천 하로촌(지금의 경북 김천시 양천동)에서 세종때 현령을 지냈던 이덕손(李德孫: 贈戶曺判書) 할아버지의 아드님으로 1416년에 태어나 1493년 78세의 세수로 고향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참으로 다사다난한 어려운 세월을 보내신 것을 알고는 옷깃을 고쳐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속 깊이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1491년 지중추부사의 벼슬길에서 은퇴하신 만년에 김천 고향 집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셨는데, 사셨던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만 하였고, 아침저녁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지내시면서도 후손들을 훈계하는 시를 지어 남기셨다. 할아버지의 인생과 생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은 이 시를 읽으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잡게 되고, 옷깃을 여미어 내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자손들을 위한  훈계 시(訓戒 詩)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 줄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낡은 바구니 표주박과 질그릇 뿐 일세.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가빈무물득지분(家貧無物得支分)
유유단표노와분(惟有簞飄老瓦盆)
주옥만영수수산(珠玉滿籯隋手散)
불여청백부아손(不如淸白付兒孫)

 노촌 할아버지께서 조정에 나가 봉사한 중요 경력과 저서를 살펴보면,
• 1441년(세종2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다.
• 1451년(문종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섬시직장(司贍寺 直長)을 지내다.
• 1454년(단종2년): 사헌부감찰(鑑察: 감사원 직원)), 황간현감(충북 황간군수), 청도군수.
• 1458년(세조4년): 유장(儒將),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감사원 계장),
        사헌부집의(감사원 국장).
• 1464년(세조10년): 선전관(宣傳官).
•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 구성 부사(龜城 府使).
• 1468년: 병으로 관직을 사직.
• 1470년 8월: 제주목사(濟州牧使: 제주도 도지사).
• 1474년(성종5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
• 1477년(성종8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대통령비서실장), 가선대부
        (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천추사(千秋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 오다.
• 1478년: 경주부윤(경주시 시장).
• 1487년 5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서울특별시 부시장). 이조참판(李朝參判: 행정안전부차관).
• 1489년: 가정대부(嘉靖大夫). 개성유수(開城留守: 황해남도 개성특별시
        시장),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 전라도 도지사).
• 1490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1491년: 지중추부사 벼슬에서 물러나다.
• 1493년 6월: 고향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하다.

 노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성종 임금은 평정(平靖)이라는 시호(諡號)와 제문과 제물을 내리셨는데, 제문에서 할아버지의 지성(至誠)과 순직(純直)을 칭송하였다. 저서에는 노촌실기(老村實記)가 있다. 노촌 이약동 할아버지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6대에 걸쳐 약 50여년 간 관직을 지냈으나 청백리에 부끄러움이 없는 공무를 집행하여 후손들에게는 물론 오늘의 공무원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노촌 할아버지 외에도 벽진이씨 가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의 하나인 청백리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기라성 같은 조상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고려조의 청백리(淸白吏)였던 이극송(李克松)할아버지는 1236년(고려 고종 23년) 명경문과(明經文科)에 장원급제, 청렴 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判三司事)의 벼슬에 올랐고, 맑고 깨끗하여 아무 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고 하여, 고종은 친히 할아버지께 「빙옥(氷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고려조에서도 우리 가문에 청백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자랑스런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 가문이기 때문에 조선조의 이약동 할아버지께서도 청백리의 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10세 이옹(李雍) 할아버지의 장남 이셨던 이견간(李堅幹) 할아버지는 고려조의 충렬•충선•충숙왕의 3왕조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이르렀고, 말년에는 산화선생(山花先生)으로 불리면서 행고학박(行高學博)한 문장가로서 벽진이문을 화려하게 빛냈다. 같은 시대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저서 「동시선(東詩選)」에서 할아버지가 지은 시구(詩句)를 뽑아 설명하면서 “동방에 두견을 읊은 시(詩) 사절(四絶) 중에서 가장 으뜸간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조의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1393~1481)) 할아버지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이시다.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 할아버지의 아드님으로 경북 선산 구미 형곡에서 태어나셨다. 1427년(세종 9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 정언(正言)과 소격서령(昭格署令), 경상도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내셨다. 거창현감으로 지내실 때 청백리로 소문이 크게 났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庾政亂)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자 거창현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고향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김숙자(金淑滋) 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지내셨으나 눈멀고 귀 먹었다 지칭하며 두문불출의 은둔생활을 계속하셨다. 그리고 세조가 있는 대궐 방향으로는 앉지도 않으셨다. 89세의 세수로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가족들도 할아버지의 귀와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1782년(정조2년) 나라에서 할아버지께 정간(靖簡)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로 추증하였다. 경은 할아버지는 인간의 중요 덕목인 절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벼슬 생활을 계속하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실행 실천하셨다. 후손인 우리들의 어느 누가 할아버지의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후손들과 백성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모든 관료들에게도 신하와 충신이 무엇이 다른지를 알렸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부모를 모신 자식으로서,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할 한 인간으로서 행동해야 할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786년(정조6년) 왕명으로 할아버지의 학문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토곡동(土谷洞)에 용계서원(龍溪書院)을 건립하였다. 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노항동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하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로 다시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의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 경북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앞에서 한 바와 같다. 할아버지께서 건립한 산천단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제주대학교 뒤 언덕 위에 있다. 꽤 넓은 제단 언저리에는 수령이 500~600여년 이상 된 늙은 거대 곰솔 8그루가 서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곰솔이라 천년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제단 터나 부근 지형을 보아서는 제단 터를 만들 당시에 곰솔을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서해안이나 남해안•동해안 바닷가에는 방풍림(防風林)으로 또는 방사림(防沙林) 목적으로 곰솔을 많이 심어 조림한다. 곰솔은 다른 어떤 나무보다 해풍과 해수에 강하고 잘 견딘다. 그리고 해충에도 강하다. 산천단에서는 산신제만 지냈던 것이 아니고, 농사의 재해 예방을 기원하는 포신제와 가뭄 때 비를 내려줄 것을 비는 기우제도 지내던 곳이라고 하였다. 겨울철에 세차게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이나 농사철의 해충을 막기에는 8그루의 곰솔 나무는 너무나 적다.

제주도의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상징적인 나무로서 곰솔을 제단 주위에 심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죽거나 훼손되어 현재 까지 남아 있는 곰솔이 8그루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단 터를 만들었던 할아버지가 방풍•방설•방재•방액(防厄)의 상징으로 곰솔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천단 인근이나 근방에 다른 어떤 곰솔 군락이나 오래된 거대 곰솔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짐작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산천단 안에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건립한 이끼가 끼고 글씨가 거의 마멸된 한라산신고선비와 작은 규모의 제단이 이 있는데, 옛 것을 그 자리에 둔 채로 제주도와 벽진 이씨 문중이 힘을 모아서 규모가 큰 새로운 비와 제단을 건립하였다. 새로 세운 비문에는 「목사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라 적혀있다. 산천단 곰솔공원은 제주도민들과 외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명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제주시 이도1동에는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다. 이 서원 안에 충암 김정(沖菴 金淨)의 사당이 있었는데, 노촌 이약동 할아버지를 함께 배향하였다. 그러다가 1675년(숙종 1년)에 충암의 사당 옆에 향사(鄕祠)를 별도로 지어 영혜사(永惠祠)라 이름하고 할아버지 위패를 이 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천 유림들이 할아버지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감천면 원동 마을에 청백사(淸白祠)란 향사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였다. 김천시 양천동에도 후손들만으로 건립한 하로서원(賀老書院)이 있다. 이 곳에서도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유림 향사를 지낸다.

동천(東川) 이상길(李尙吉: 1556~1637년) 할아버지는 공조판서로 봉직하시던 1636년(인조 14년)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강화도가 청나라 적에게 함락되자 아드님 이셨던 이경(李坰)의 후퇴 청을 듣지 않으시고 “종묘와 사직이 망하려 하는데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스스로 목매 자결을 하셨다.

이 때 할아버지의 춘추가 81세 이셨고,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셔서 보통 사람 같으면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형편이었는데도 할아버지께서는 사직의 운명과 명을 같이 하신 것이다. 후에 조정에서는 좌의정(左議政)의 증직과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려 할아버지의 충절을 높이 기렸다. 뒤에 강화도에 충열사를 세워 우의정을 지내다 할아버지와 같이 자결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 충신과 함께 제향 하였다.

충숙공 이상길 할아버지의 주요 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576년(나이 21세):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합격.
• 1578년(23세): 진사시 초시(進士試 初試)에 합격.
• 1585년(30세, 선조18년)): 식년문과 갑과(式年文科 甲科)에 차석급제, 풍저창직장(豊儲倉 直長).
• 1592년(선조25년,37세): 예조정랑(禮曺正郞),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평안도에 피난.
• 1594년(선조27년,39세): 병조정랑(兵曺正郞), 익산군수(益山郡守).
• 1598년(43세): 광주목사(光州牧使), 당상관(堂上官).
• 1602년(47세): 2월에 모함을 받아 황해도 풍천으로 귀양, 1607년 5월,
        2일에 사면됨.
• 1604년(49셰): 유배 중에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녹훈.
• 1608년(53세): 강원도 회양부사(淮陽府使).
• 1611년(56세): 평안도 안주목사(安州牧使).
• 1615년(60세): 호조참의(戶曹參議).
• 1617년(62세): 병조참의(兵曹參議).
• 1623년(68세):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참의(兵曹參議).
• 162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평안도관찰사(平安道 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 1625년(70세):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 1628년(73세): 예조참판(禮曺參判), 전주부윤(全州府尹).
• 1632년~1634년(77세~79세): 병조참판(兵曹參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 예조참판(禮曺 參判).
• 1635년(80세): 자헌대부(資憲大夫), 상호군(上護軍), 중추부지사(中樞府 知事), 공조판서(工曺判書).
• 1636년(인조14년, 81세): 공조판서로서 종묘사직 위패를 모시고 병자호란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이동하시다.
• 1637년 정월(82세): 강화도에서 순절하시다.

22세 이신 충숙공 동천 이상길 할아버지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셨던 아버지 이희선(李喜善) 할아버님의 아드님으로 1556년(명종11년) 병진 12월 3일, 한양 주자방에서 출생하셨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충숙근린공원에는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동천재(東川齋)와 충숙이공신도비(忠肅李公神道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있고, 충영각 안에는 할아버지 연세 80에 김명국이 그린 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동천재 옆 언덕에는 할아버지의 묘소와 아버님 되시는 찬성공 이희선 할아버지 묘소, 백씨 되시는 편사공 이상철 할아버지의 묘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 동천재 앞뜰에서는 해마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강원도 지방에 사는 후손들의 모임인 서울화수회가 열리며, 후손들의 친목과 활발한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난세를 만났던 나라에 출사한 동천 이상길(東川 李尙吉) 할아버지께서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나라를 위한 충절 하나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시고 나라와 우리 벽진 가문을 크게 빛내신 위대한 선조의 한 분 이시다.

그리고, 근세 19세기 중엽에 와서 나라와 우리 벽진 가문을 크게 빛내신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년) 할아버지가 있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아버지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 할아버지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화서 할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태두이시다. 할아버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재야 선비이셨다. 할아버지는 전통적 문화의식과 정치제도를 계승하면서 서구열강의 도전을 제국주의적 침략이라 규정하고, 그들의 문명 일체를 배격함으로써 민족보존의 길을 찾으려는 척사위정사상(斥邪衛正思想) 형성에 크나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성리학의 대학자이셨다.

이 척사위정사상은 당시 사회의 시대적 현실에 대응하려는 논리로써 개항기 서세동점의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현실대응론 이었으며, 실천운동으로 행동화한 사상이었다. 특히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운동인 항일민족운동은 화서학파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서학파 유생들은 국권수호를 위한 이론을 체계화 하고, 우국충절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 방법을 모색하였다.

당시 항일운동에 몸을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는 화서학파 출신들이 많았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선생을 비롯하여, 조선 13도 의병도총제를 지낸 의암 유인석(懿庵 柳麟錫)선생,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학자로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든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黙)선생과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선생, 외세 배척의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을 당한 홍재학(洪在鶴)선생,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梁憲洙) 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 등이 모두 화서 이항로 할아버지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이룬 선비이셨으나 할아버지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문하에 많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의 학문이 점차 조정에 까지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던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완곡하게 사양하고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셨다.

2019년 10월15일, 사단법인 화서헉회 화서연원록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화서연원록 상․중․하권에는 화서 선생의 학문과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나 큰 영향력을 끼친 제자가 2018년 현재 남한에서만 발굴한 인재가 11,000여명이나 됨을 밝히고 있다(장삼현 편저, 2019, 화서연원록 상․중․하, 사단법인 화서학회 화서연원록편천위원회, 1~2,442쪽).

화서 이항로 선조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808년(순조8년): 과거에 합격하시다.
        과거시험에 부정이 있고, 관리로 진출하는데도 권모술수가 있음을 알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신다.
• 1840년: 장사랑(將士郞) 벼슬을 사양하시다.
• 1850년: 휘경원 참봉(徽慶園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시다.
• 1864년(고종1년): 지평(持平), 장령(將令), 당하관, 통훈대부 등의 벼슬도 모두 사양하시다.
• 1866년(고종3년): 조정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曺參判) 벼슬을 내림. 병인양요가 일어나다. 화서 선조께서는 분연히 일어나 흥선대원군에게 달려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시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의 실정을 비판하고, 만동묘 (萬東廟)의 재건을 주장하시다.
• 1902년(광무9년): 자헌대부(資憲大夫), 내무대신 증직(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4년이 지남).
• 1905년(광무12년): 황제 칙령으로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리다.

화서 이항로 할아버지는 벽진 이문이 배출한 조선조의 거목이셨으며, 위정척사사상과 우국애민의 실천교육으로 근대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토대를 이룬 성리학의 위대한 대학자 이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할아버지의 일생을 지배한 주제도 결국 충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가면 할아버지의 생가와 사당이 있는 노산사와 화서기념관, 벽계강당,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벽계구곡(蘗溪九曲)이 펼쳐지는 푸른 강이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고려조의 이극송(李克松)• 이견간(李堅幹) 할아버지, 조선시대의 이맹전(李孟專)• 이약동(李約東)• 이상길(李尙吉)• 이항로(李恒老) 할아버지들께서는 우리 벽진 가문을 찬란하게 빛낸 거목들이셨고, 후손들에게는 불멸의 자원이 되시는 선조님이시다. 이렇게 찬란한 우리 가문의 역사는 후손인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조상의 위대한 행적과 사상은 나에게는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 청정 재생 에너지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풍요로운 자원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는 순전히 우리 후손들인 나와 각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고 본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후손들 가운데서도 각계각층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들의 투철한 청렴• 충절• 절의 정신을 스스로 자기 인격화하여 일생동안 자긍심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바로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하고 조상을 기리는 길이 될 것이고 나라 발전을 이루는 초석이 될 것이라 라고 생각한다.

자랑스런 조상들의 행적과 역사의 뒤안길에는 항상 인내와 절제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내 혈관에 우리 벽진 이씨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린 조손인 나에게 청백리 자손이라고 가르치시며 자긍심과 자존심을 심어주시려고 애쓰셨던 내 증조모님을 늘 존경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서울대학교총동문회 이사
                                                                                      강원도교원총연합회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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