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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 뿌리는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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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천 댓글 7건 조회 8,329회 작성일 20-01-2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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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 뿌리는 혁명가였다.
-시조 할아버지의 고뇌와 혁명적 결단 -

                          이학원(35세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1. 시조 이총언 할아버지의 고뇌

시조 이총언 할아버지는 신라 사람이었고, 수도였던 서라벌 북서쪽의 정치·군사적 요충지였던 신라 벽진성(碧珍城)의 유능한 성주이셨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신라 지역의 한 성주이셨던 할아버지께서 하루아침 갑자기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이란 고려국의 관작을 받으시고, 우리 벽진 이 씨의 시조가 되셨을까.

이와 같은 격변적이고 혁명적인 역사적 사실은 그 역사의 전개 과정을 소상하게 알아보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시조 할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신라인으로서 신라의 벽진성 태수이셨고, 그 지역에서 출생하시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곳에서 거주하셨던 것으로 생각되는 지역 호족이셨을 뿐만 아니라, 벽진성 성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과 존경을 받는 유능한 지도자이셨기 때문에 신라인이 고려의 개국원훈이 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얼른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오늘 날의 후손들이나 지역민들에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왜소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내가 벽진장군의 후손이란 사실을 안 청소년시절 부터 내가 장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러웠지만, 내 체격과 성격이 전쟁터에서 서슬 퍼런 칼과 창을 휘두르던 장군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유약한 면이 많았고, 좀 더 참으면 되었을 일이었는데도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급한 성정을 참지 못하고 위험에 처한 일도 있었고, 또한 그 자존심 때문에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을 당했거나 위기를 맞았을 때 용기를 내고 인내할 수 있었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서도 지혜롭게 잘 극복할 수 있었던 원천적인 힘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철없던 청소년기는 물론, 철이 좀 든 나이까지도 시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부모와 할아버지, 가까운 조상님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지위가 우리 후손들의 삶과 인격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 모두가 다 잘 경험하여 아는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또 먼 훗날 후손들에게 좋은 조상이 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농부였기 때문에 내 아버지보다도 더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던 벽진장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장군의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은 언행을 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 벽진이씨 어느 후손인들 우리들의 종훈(宗訓)인 가전청백(家傳淸白)과 세수충근(世守忠謹)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벽진 이 씨의 후손이라면 “청렴과 결백이 온 가문에 전해지고, 충직과 삼가는 마음이 대대로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우리 일가 종훈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종훈은 기라성 같은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업적과 훌륭한 언행과 가르침으로써 만들어진 우리 자손들만이 마음껏 누리는 위대한 정신적인 유산을 따와서 정한 것이다. 청렴과 결백, 충직과 삼가는 마음은 우리 벽진 이 씨 자손들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정체성이기도 하며, 이 정체성은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천년이 지난 오늘 날 까지도 우리 후손들의 의·식·주 생할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생할철학이 되어 우리 가슴을 덥게 한다. 또한 이 정체성은 우리 후손들 모두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는 채찍이 되고, 후손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나는 나의 시조 할아버지가 단지 장군이셨다는 토막 지식 하나 때문에 죽을 고비를 맞은 때가 있었다. 필자가 진주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여름철에 장마가 져 진주 남강물이 불어나 누런 황토물이 강둑 가득 소용돌이를 치면서 하류를 향하여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진주가 고향인 같은 반 김두태라는 친구가 진주사범학교 가는 길 몫의 만경대 부근의 남강 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물 구경을 시켜주었다.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낙동이 내 고향인 시골 촌놈이 동네 안 조그마한 실개천에서 개헤엄을 치며 놀았던 것이 전부였는데, 누런 흙탕물이 강둑 가득 거칠게 흐르는 넓고 큰 진주 남강을 보고 크게 놀라 어리둥절해 하며 신기해하는 나에게 느닷없이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거칠고 큰 강물이라도 이 곳 둑에서 옷과 신발을 벗어 허리끈으로 머리 위에 묶은 다음, 강 저쪽을 향하여 헤엄을 쳐가면,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결국은 강 저쪽에 닿을 수 있다. 여름이면 자기는 이런 일을 자주하는데, 아주 스릴이 있고 재미있다며 은근히 자랑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를 따라 도도히 흐르는 저 강물을 헤엄쳐 건널 수 있겠느냐며 촌놈인 나를 깔보는 듯한 얼굴로 웃으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촌놈인 친구를 시험하려 드는 것 같았다. 비록 내가 시골에서 진주로 지방유학을 온 열세 살의 촌놈이었지만, 어릴 때 고향 낙동 실개천과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익히고 닦은 기초적인 개헤엄 실력이 있었다. 기가 죽어서 친구에게 눌리기 싫었다. 그렇지! 개헤엄이라면 자신이 있다. 어디 한 번 붙어보자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굳히게 된 배경에는 단지 내가 벽진장군의 후손이라는 자존심 하나가 나의 피를 끓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뻘건 황토물이 거칠게 흐르는 이 같은 큰 강물을 건너 강 저쪽으로 헤엄쳐 건너간다는 것은 그 때까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속으로 겁이 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진주까지 지방유학을 보내 주셨는데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애지중지 어미죽은 나를 이 나이까지 키워주신 할머니의 애통해 하실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나는 벽진장군의 후손이 아닌가! 친구인 네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다짐을 하며 용기를 내기로 했다.

준비체조를 한 후 결행을 했다. 후회를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를 따라 3m 정도 헤엄을 쳐나갔는데, 물살이 상상 이상으로 거세게 그리고 빙빙 돌면서 하류로 향하여 흐르고 있었다. 헤엄쳐 가는 내 힘보다도 탁류의 물살은 더 빠르고 거칠었다. 나는 누런 황토 빛 탁류에 떠밀려 떠나려가기 시작했다. 앞에서 헤엄쳐 가던 친구도 나와 점점 멀어지면서 머리만 솟구쳐 잠간 보였다 말았다 하면서 떠나려가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되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강 건너 저편을 향하여 헤엄을 쳐나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강을 건너는 데는 예상보다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얼마나 떠내려갔는지 모른다. 닿은 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는 생소한 곳이었다. 강변에 무성하게 자란 조그마한 대나무 가지를 붙잡고서야 겨우 살아 날 수 있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강가 진흙탕에 벌렁 쓰러졌다. 내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더 멀리 떠나려갔는지 근처에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도 강둑에 길게 자란 풀을 붙잡고서야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열 세 살짜리 철부지 중학교 2학년 소년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들풀이었고, 대나무 가지 같은 보잘 것 없는 대 자연의 일부가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 강변에 쓰러져 누운 얼굴 위로 여름철 땡볕이 사정없이 내려쬐는데도 온 몸이 오싹 오싹하고 전신이 오돌 오돌 떨렸다. 오래 동안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누워 있다가 한참 후에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다시는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존심으로 이런 어리석은 만용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부모님이나 할머니께도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요즘 같으면 누군가 119에 신고하여 떠내려가는 소년들을 구해줄 수 있었을 법도 한데,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내내 사람들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지 않았었다. 철없던 벽진장군의 후손 하나가 시조 할아버지와 그의 자존심을 지키려다 흙탕물 홍수 진주남강에 빠져 영영 고혼이 될 번 하였다.

철이 좀 든 이후에는 시조 할아버지에 관한 단편적이고 꼭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나의 시조이신 이총언 할아버지께서는 신라 말 벽진성의 태수이셨지만, 문무를 겸전한 신라 화랑도 출신의 김유신이나 관창, 사다함, 죽지랑과 같은 무관 출신의 장군이 아니셨고, 지방 호족(豪族: 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 출신이셨다는 사실과 벽진장군이란 관작은 신라가 망하고 난 후, 고려 왕건 태조가 고려개국 원훈이셨던 할아버지께 벽진성을 식읍으로 내리고 벽진 이 씨 성씨를 하사하여 벽진 이 씨의 시조가 되셨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겨우 알아 낸 지식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 핏줄의 시작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을 것인지? 이런 의문이 시작되면서부터 시조 할아버지에 관해 알아본 것인데 너무나 단편적이고 짧은 지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시조 할아버지로 부터 1,154여년 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면면이 핏줄로 이어져 왔으며, 현존하는 10여 만 명의 혈손 중에 한 사람이란 것도 겨우 알아냈다. 내가 시조할아버지의 35세손이 되고, 원(源)자 항렬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철이 나면서 겨우 알아냈다.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 세자에 항렬의 원(源)자를 넣어 벽진 이 씨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알려주시고 세손관계와 항렬질서를 잘 알 수 있도록 배례해 주신 점을 늘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오게 되었다.

KBS에서 2000년 4월1일부터 2002년 2월까지 방영한 “태조 왕건”이란 대하드라마를 보고 시조 할아버지와 고려 왕건 태조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후백제의 왕이라고 스스로 칭한 견훤왕이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를 정벌한 후 개선하는 도중에 공산(公山: 지금의 팔공산, 조선시대 이후 팔공산이라 부름)에 이르렀다. 그 때마침 신라를 도우려고 지원군을 이끌고 온 왕건 태조와 이 곳에서 맞닥뜨리게 되어 사생결단의 치열한 공산전투를 벌이게 된다. 결국 후백제 견훤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대패한 왕건 태조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자, 휘하의 신숭겸 장군이 왕건 태조의 복장으로 바꿔 입고, 왕의 휘장을 날리며 왕건 태조로 위장한 후 견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신숭겸(申崇謙) 장군은 이 싸움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주군(主君) 왕건 태조를 위하여 탈출로를 열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버는 동안, 왕건 태조는 필마단기로 대구 앞산에 있는 은적사(隱迹寺)를 거쳐 시조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던 벽진성(碧珍城)에 숨어들어가 겨우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결국 고려의 최고의 장수였던 신숭겸 장군이 목숨을 잃고 만다.

그 뒤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이셨던 영(永) 할아버지께 명령을 내려 대군을 거느리고 왕건 태조를 호위하여 고려 수도였던 개경(개성)까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우호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고려 왕건 태조와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생명의 은인이라는 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렇게 어렵게 생명을 구한 왕건 태조가 결국에는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하여 통일 된 고려 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인 큰 공을 세우게 되면서 시조 할아버지의 위상도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흔히 시조 할아버지를 고려개국원훈 벽진장군(高麗開國元勳 碧珍將軍)이라고 칭하는데, 개국원훈(開國元勳)이란 말은 개국공신(開國功臣)이란 말과 전연 다른 개념의 말이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통일된 고려 국가를 개국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왕건 태조와 비견하여 볼 때 그와 맞먹는 비중과 크기로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개국공신이란 말은 왕건 태조 휘하에서 태조를 도와 고려 개국과 통일 대업을 이루는데 많은 도움을 준 신숭겸(申崇謙: 평산 신씨 시조), 배현경(裵玄慶: 경주 배씨 시조), 복지겸(卜智謙: 면천 복씨 시조), 홍유(洪儒: 남양 홍씨 시조), 유금필(庾黔弼) 같은 장군들이나 책사들을 말한다. 고려 개국공신은 모두 합쳐 2,000여 명에 달한다. 고려개국원훈이란 말은 우리 후손들이 시조할아버지의 공덕을 높여 붙여서 부르는 말이고, 벽진장군이란 작위는 고려 조정이 할아버지께 정식으로 내린 작호다.

시조 할아버지께서 신라 벽진성 태수였던 후삼국 시대의 신라 말 국운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때는 왕권이 미치는 영역은 수도였던 서라벌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왕이 머무는 수도권을 벗어나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성주나 호족이 독자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행사하면서 각기 개별적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각 지역에는 도적 떼가 날뛰기 시작하였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신라 말 사회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하여 희망이 없는 암울한 사회가 계속되다가 결국에는 935년 동안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신라 운명의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라가 935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태평성대를 누리며 잘 살았던 것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군사제도와 같은 특출한 인문환경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정치•군사적 안정을 가져다준 자연환경 요인이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자연환경 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와의 국경을 이루었던 험준한 소백산맥과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과 이 양대 산맥과 연계되어 발달한 수많은 지맥들이 신라를 외침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어막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과 같이 첨단 무기가 발달한 현대전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산맥이 방어의 큰 기능을 감당할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는 칼과 창, 활이 주 무기였던 때라, 국경지대의 험준한 산맥은 외적을 막는 중요한 방어막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양대 산맥은 백제와 고구려의 외침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주는 천연요새와 같은 자연방벽을 이루고 있었고, 동쪽과 남쪽에 펼쳐져있는 광활한 동해와 남해 바다 역시 그 당시로서는 외적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방벽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 서라벌의 위치가 군사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중으로 둘러싸인 높은 산맥으로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는 데다, 큰 강과 많은 하천들이 이중삼중으로 가로막고 에워싸고 있어서 외적이 쉽게 침입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였다. 6•25전쟁 때도 낙동강 방어선은 북한공산군의 침입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살려낸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포항 영일만과 울산 앞바다인 울산만 사이에 발달한 좁고 긴 저지대를 이룬 형산강지구대 내부인 지구(地溝: graben) 지역에 위치해 있다. 형산강지구대 안의 좁고 긴 이 평야지역은 농경지와 고대도시가 발달할 수 있는 넓고 광활한 택지를 제공하였고, 동해 영일만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과 남해 울산만 방향으로 흐르는 태화강은 이 지역에 필요한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및 식수를 공급해 주는 중요한 강으로서 서라벌과 같은 고대도시가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수도 서라벌의 북서쪽과 남동쪽에 발달한 두 개 방향의 지루(地壘: horst)는 포항만과 울산만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단층산맥을 형성하여 오랫동안 침식을 받았지만 깎아지른 듯한 경사로 이루진 급한 경사의 높은 산지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수도 서라벌은 높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또 한 번 더 형산강지구대가 만들어 놓은 두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중의 자연방벽을 가진 천연요새 같은 곳에 위치한 덕택으로 935년이란 긴 세월동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정된 신라 수도로서 서라벌이란 고대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신라의 젖줄인 낙동강과 그 지류인 금호강, 밀양강, 남강, 황강 등은 중요한 군사적 방어선 역할도 하였지만, 각 하천유역에 발달한 광대하고 기름진 평야와 수적으로 많은 넓은 분지지역에서 생산되는 풍요롭고 다양한 농산물은 신라의 경제를 윤택하게 하는 근본이 되었다. 기후 역시 삼국 중에서 가장 남쪽의 따뜻한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1년 내내 인간 활동이 활발하여 풍요로운 의식주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북서쪽의 소백산맥과 동해안의 태백산맥 지맥들은 겨울철의 북서풍과 북동풍을 막아주었고, 남해안과 동해안을 따라 흐르는 따뜻한 난류의 영향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1년 내내 따뜻한 기후가 나타나 인간의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풍요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불교문화를 발달시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문화 수준이 그 당시 어느 국가보다도 높았다.

특히 신라 진평왕 때 중이었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신라의 지도층이 될 화랑도들에게 준 다섯 가지 교훈이었던 세속오계(世俗五戒)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사친이효(事親以孝: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교우이신(交友以信: 벗을 사귀는 데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며),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나아가 물러나지 않아야 하며),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생을 하는 데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함부로 살생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 는 신라의 지배계급을 형성하던 화랑도들에게만 주어진 교훈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르침으로서 모든 신라인들의 의식주 생활에 깊게 파고든 생활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까지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 모든 한국인들이 배우고 익혀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꼭 실천해야할 생활철학의 주요 덕목이 되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울고, 큰 나무가 베어져 쓰러질 때 그 소리가 요란하듯이, 신라 말에 나타난 각종 암울했던 사회현상은 백성들의 불만을 폭발 직전으로 이끌어 국운이 기울어져 감을 실감하게 하였다. 신라 사회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었던 엄격한 골품의 6두품제도는 폐쇄성과 경직성이 지나쳐서 능력 있는 백성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만들어 그 불만이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있었고, 수도 서라벌의 위치가 외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았으나 동남쪽으로 너무나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어려워지면서 지방호족들의 발호(跋扈: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함부로 날뛰는 것)를 부추기는 지역지리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여기에 더해 진골 간의 왕위 다툼으로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오랜 가뭄과 홍수로 인해 흉년이 자주 들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진데다, 지배세력들의 사치와 수탈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원성과 불만이 겉잡을 수없이 팽배하여 사회 각계각층 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었으며, 각 지역에 도적떼들이 날뛰면서 사회 혼란이 극치에 이르렀다. 결국 신라의 국운이 그 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야심찬 후삼국 통일의 열망으로 가득 찬 고려 왕건 태조가 이러한 신라 말의 사회적 약점을 간과(看過)할리 없었다. 왕건 태조는 신라 국경지역이나 서러벌 정벌과 고려군 진군에 유리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 난세의 신라 백성들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운 신라의 호족들이나 성주들을 대상으로 사신과 책사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교류와 소통을 하면서 후삼국 통일 대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시조 할아버지께서 다스리던 벽진성의 정치·군사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나, 성안 백성들이 성주이셨던 시조 할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신망이 두터운 것을 파악한 왕건 태조는 신라의 벽진성을 군사적으로 정벌하는 것 보다는 소통과 교류를 통하여 성주와 백성들의 인심을 사고, 왕건 태조의 후삼국 통일 대업에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원하고 요청하였을 것이다.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나라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건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 목에 위치했던 벽진성 성주 시조 할아버지의 선택은 불행하게도 단지 두 길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기울어져 가는 신라를 정벌하려는 왕건 태조의 고려군을 맞아, 벽진성 성주나 벽진성 성안 백성들 모두가 군사적 열세로 인하여 모두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합심하여 싸우며 신라인의 기상으로 명예와 충절을 깨끗이 지키며 옥쇄(玉碎)하는 방법이 하나 있었고, 또 한 가지 선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어쩔 수 없이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신라인의 한 성주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져 갈지라도 성주를 믿고 따르던 수많은 벽진성 백성들의 뭇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보다는 왕건 태조의 통일대업에 동참함으로써 성주이셨던 당신은 죽으면서도 백성들을 구하는 방법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던 그 시대, 그 장소가 시조 할아버지의 운명을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계셨던 시조 할아버지의 고뇌와 번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존경하는 내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죽고 성안 백성들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부모처자식을 봉양하고 그들의 생명을 온전하게 지켜야할 한 인간으로서, 성안 백성들의 뭇 생명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해야할 고립무원의 한 성주로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번뇌에 시달리며 애 끊는 시간을 보내셨을 것인가.

일가 종원 여러분들께서 이런 경우를 당하셨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 수 있겠는가?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비록 화랑도 출신은 아니셨지만, 신라 말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난세를 당하셨어도 굳건히 벽진성을 지키며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유능한 성주이셨는데, 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모르시고, 세속오계의 가르침과 교훈을 모르고 계셨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쇠망해 가는 조국 신라를 버리고, 후삼국 통일 대업에 명운(命運)을 건 고려 왕건 태조에게 왜 벽진성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문제 제기는 우리 후손들에게 역사적이고 정치철학적인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비록 신라가 망하고 그 자리에 고려 국이 들어섰지만, 옛 신라인의 뿌리를 가진 일부 영남지방 사람들과 우리 후손들의 일부는 시조 할아버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고, 깊은 생각과 번민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조 할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시조 할아버지인들 임전무퇴의 화랑도 정신과 세속오계를 모르고 계셨겠는가.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화랑도들의 교훈이었던 세속오계의 근본적인 내용 핵심은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의 섭리를 순리로 따르시면서 불안한 신라 말의 벽진성 성안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그 들의 생명을 살려냄으로써 천추만대로 그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특단의 혁명적 결단을 내리신 것이 아니겠는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구질서를 뒤엎고 새 질서를 만들어 세상을 바꿔 놓는 것이 혁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혁명은 의지에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와 더불어 신라인으로서의 생명은 다하셨지만, 왕건 태조와 더불어 통일대업에 참여함으로써 고려개국의 위대한 업적을 역사에 남기게 되셨으며, 그 혁명적 결단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벽진 이 씨의 시조 할아버지가 되신 것이 아니겠는가.

시조 할아버지께서도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모르시는 성주가 아니셨을 것이다. 세상인심은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물에 빠진 놈 구해 놓았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며 챙기고, 똥 누려 갈 때 마음하고 똥 누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처럼, 세상과 백성들의 민심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며 변화무쌍한 것이다. 칼과 화살에 죽어 갈 성안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내셨지만, 당신께서는 후에 그 지역의 옛 신라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실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시조 할아버지의 수많은 번뇌와 고민을 동반한 혁명적 결단으로 일단 목숨을 보전하게 된 성안 백성들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쇠망한 옛 신라인의 향수에 젖어 자기 체면을 차리기 위한 대의명분을 찾고, 화랑도의 교훈이었던 세속오계를 논하며 자기들은 고려군을 맞아 대적할 마음이 있었는데, 성주가 그 기회를 빼앗아 이렇게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게 되었노라고 대를 이어가면서 비판적 시각을 놓치지 않는 가문이 전연 없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이 세상인심 이다.

2. 시조 이총언 할아버지의 혁명적 결단

필자는 이런 비판적 시각이 천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 지역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고려 초기나 신라 말의 역사의 전개과정을 깊이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무엇이며, 혁명이 언제,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지도 잘 모르면서도 대의명분만 앞 장 세운 채, 자기를 현시하고자 생각이나 행동을 유치하게 하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하는 소아병적(小兒病的) 인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알고 많이 놀랐다.

필자는 이런 문제 때문에 나 혼자 한동안 깊은 고민과 번뇌를 한 때가 있었다. 지리학도인 필자는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학생들을 인솔하고 해마다 영남지역, 호남지역, 강화도와 경인지역, 강원도 지역 등을 번갈아가며 전국을 답사하며, 각 지역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를 공부하며 지내왔다. 그리고, 각 지역 지리학자들과 학술대회 모임을 갖거나 학회활동의 일환으로 교수들끼리 각 지역을 답사하며, 그 지역의 자연이나 인문지리 및 문화를 잘 아는 지역지리 학자를 초빙하여 차중 설명을 듣기도 하고, 현장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지리학술대회의 일환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 지역답사에 경북지역 지리학자들은 물론, 전국 대학에서 참가한 지리학자들과 대학원 학생들이 대거 참가한 학술답사대회가 있었다. 이 날 답사에서 차중 설명을 맡은 교수는 세세손손 대구지역에서 살아온 학자 집안 출신으로서 문화지리학을 전공한 초빙 교수가 답사 지역의 문화경관 설명을 맡았다. 답사가 진행되는 차 중에서 그 교수는 경북지역이 아닌 타 지역에서 온 교수들의 성씨와 본을 물어보고, 경북지역에서 발달한 해당 성씨의 집성촌과 조상의 내력에 대하여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답사에 참가한 여러 교수들과 대학원 학생들에게 경탄과 더불어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그 교수의 명쾌한 설명에 놀라며, 그의 설명을 들은 교수들과 대학원 학생들은 깊은 인상을 받으며 그 교수에 대해 많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춘천의 강원대학교에서 참가한 필자에게도 기다리던 질문이 왔다. 나는 자랑스럽게 나는 벽진 이가이고, 본은 경북 성주군 벽진이라고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들어도 만족스럽고 답사에 참석한 타 지역의 교수들이 들어도 만족할만한 설명이 있기를 기대하며 그 교수님의 설명을 기다렸다. 박학다식한 그 교수님이 우리 벽진이씨 가문을 모를 리 없었다. 우리 벽진 이 씨 가문 내력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 가문 출신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기라성 같은 선조이셨던 고려시대의 이극송(李克松)‧ 이견간(李堅幹) 할아버지와 조선시대의 이맹전(李孟專)‧ 이약동(李約東)‧ 이상길(李相吉)‧ 이항노(李恒老) 할아버지를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 밖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이 그냥 넘어 갔다. 순간 그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좀 미안한 듯, 설명이 없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잠간 쳐다보더니, 곧 다른 교수에게 다시 그 분의 성씨와 본을 묻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했다. 저렇게 박학박식한 교수가 벽진이씨 근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모른다 해도 생육신의 한 분이신 이맹전 할아버지나 근세의 위대한 성리학자 이셨던 이항노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고 있을 게 뻔한데 그냥 넘어가다니, 나는 그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답사 시간 내내 언짢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으니, 그 시각 이후, 그 교수의 다른 설명이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다. 답사가 끝나고 저녁을 같이 하면서 설명을 안 한 연유를 물었다. 나는 그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요지는 고려시대 474년(918~1392년), 조선시대 518년(1392~1910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80년(1910~1990년)을 합하여 1,072년이 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경북지역 일부 식자들 간에는 아직까지도 내 시조 할아버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이 교수 얼굴을 보아 모르는 척 넘어가며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듣고 대학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현존하는 여러 사학자들을 만나 내 시조 할아버지가 그 당시 당면하셨던 신라 말의 암울했던 사회 현상과 현실적인 정치적 고민과 혁명적 선택과 결단이 우리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아야만 옳은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사학자들의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려고 애를 쓰면서 지내왔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말은 시조 할아버지의 혁명적 결단은 역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고, 화랑도 출신의 무장 출신의 성주는 아니셨지만, 세속오계의 핵심적인 정신인 경천애민의 정치철학으로 당신께서는 신라 성주로서의 정치적 생명은 다했을 지라도, 한 성주가 죽어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한 일은 성주와 성안 백성들이 적군과 대적하여 모두 죽는 것 보다 훨씬 훌륭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사(靑史)에 빛날 휴머니스트(humanist)가 아니었으면, 혁명가적 기질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을 행하였으며, 결국은 당신께서는 죽으셨지만 다시 더 오래, 더 높게 사시게 되었고, 벽진 이 씨의 훌륭한 시조가 되신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또한 시조 할아버지의 혁명적 결단은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통할 수 있는 사안이고, 눈앞에 전개되는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탁월한 정치적 안목과 정치철학을 갖고 계셨던 훌륭한 성주이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나는 진심으로 시조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지금까지 나 자신부터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 우리 대종중에서 일어났던 시조 할아버지의 묘 복원 사업과 영 할아버지의 고려 태조 부마론이 대두되면서 일가 간에 조성되었던 깊은 갈등과 분열상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10세 옹(雍) 할아버지에 이르기 까지, 근 300년 동안 후손들이 선조들의 산소를 단 한 기도 찾아서 모실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여겨졌다. 나라가 바뀌고 사회 인심이 바뀌는 과도기를 살아오셨던 영명하신 시조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묘를 조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화장을 한 후 유골을 뿌렸거나 일시적으로 사찰에 모셨다가 대를 지나는 동안 자손들이 사찰의 적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나 각종 사회혼란이 조성되었을 때 지역 난민들로부터 분묘가 훼손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선조들도 그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 후손들 어느 누가 시조 할아버지나 조상님들을 높이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여러 일가 종인들이 다 같이 수긍하는 역사의 순리를 따라 시조 할아버지도 모시고, 가까운 선조님들도 정성껏 모시며 화목한 일가가 되어 훌륭한 선조님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후손들이 시조 할아버지를 좀 더 명예스럽고 존경받는 할아버지로 받들어 모시는 데는 여러 가지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의 방안으로 벽진장군 이름의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시조 할아버지께서 성주나 식읍으로 다스렸던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과 벽진면 출신의 뛰어난 젊은 청소년이나 대학생, 대학원 학생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벽진장군 이름으로, 장학금 수혜를 베푸는 후덕(厚德)한 행사를 갖는 것도 할아버지의 덕을 높이 받드는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학재단 설립이나 장학기금 조성, 장학금 수여 장소와 시기 등은 대종중 회장단과 대종중 지도부가 의논하여 구체적으로 정할 일이지만, 장학금 수여 대상에 후손들을 포함 시키느냐 제외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 일가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록 고려 왕건 태조에게 항복하여 신라가 망하였지만,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향유했던 옛 신라의 후손임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갖는 지역정서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한, 우리 후손들 스스로는 낮추면서도 진정으로 시조 할아버지를 공경하며 높이 받들 수 있는 조용하면서도 먼 장래를 내다보는 효과 있는 사업이 추진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는 2015년 깊은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이렇게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우러러보며, 훌륭하신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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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원님의 댓글

이철원 작성일

신라말 벽진장군 이총언이 벽진성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여 (일부 사람들은 왜 끝까지 신라에 충성하지 않았냐고도 말하지만) 백성을 편안히 보존한 것도 혁명적 애민정신이었고

벽진장군의 17세손 노촌 이약동 선생이 산천단을 한라산 꼭대기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시켜 (겨울에 제사짐을 나르느냐 백성들이 얼어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백성들을 편안케한 것도 혁명적 애민정신이었다고 봅니다.

다른 제주목사들은 군소리 없이 다하였는데 오직 이약동 목사만이 힘들다고 하며 산천단을 옮겼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약동 목사의 조상인 벽진장군도 신라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학원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긴 글을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hwlee41님의 댓글의 댓글

hwlee41 작성일

이철원 노촌기념사업회 부회장님께
감사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시고 좋은 의견까지 개진해 주시니 참으로 기쁨니다.
이총언 벽진성 성주이셨던 시조 할아버지께서  신라말 풍전등화 같은 정세 정황에서 진정으로 신라와 신라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1164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35세손인 이 못난 후손 이학원이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성씨 가문이나 훌륭한 시조와 중시조가 있기 마련인데 이 피 뿌리를 찾아 자기 정체성을 잘 알아보는 것이 나를 알아보는
첫걸음이란 것을 늦게야 알게되었습니다. 이철원 이학원이가 중시조  17세손 노촌 이약동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학원. 2020년 1월 27일, 춘천에서 올림.

이영희님의 댓글

이영희 작성일

장문의. 글을올리시느라. 애쓰셨읍니다.  저의 시조. 벽진장군 할아버지 역사. 자랑스럽게. 잘 읽었고. 많은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학원님의 댓글의 댓글

이학원 작성일

이영희님! 오랫만 입니다.  역사를 공부하신 님을 만나니 왜 나는 이렇게 작아지는지요?
감사합니다. 우리 후손들 중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후손들이 참으로
부지기수 입니다. 그 중에 우리 이영희 님도 계십니다. 장문의 부족한 내용의 글을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후안 폐렴 바이라스 감염 위험 시기를 잘 넘기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학원 배상.

이영희님의 댓글

이영희 작성일

감사합니다 나의 뿌리를찾아  그 정체를. 이렇게 소상히  공부하기는  부끄럽지만. 처음 입니다.  울 벽진 장군할아버지의. 역사를. 널리 알려 주십시오 저어도. 벽진이가 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것이고. 나의. 시조. 할아버지가. 장군이셨다니.  너무나. 자랑스럽읍니다.

이영희님의 댓글

이영희 작성일

요즘. 백세 시대라고 하는데. 저는. 50대후반입니다  그럼 백세시대 절반을 더 살았는데 힘들때마다.  오기가 생기고 더 강인함이. 나를 똘똘 뭉쳤는데.  강인함이 어디에서 오는걸까 어떨땐 나자신도. 놀랄때가 많았읍니다. 이젠 의문이 풀렸읍니다. 내 피는 . 장군 할아버지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인것을.  장군할아버지의 후손임을 너무나. 자랑스럽고.  한점부끄럼없이 살것을.  다짐하면서.  나자신과 주변을. 밝히고 살피겠읍니다.

이학원님의 댓글

이학원 작성일

이영희님께
아주 어릴 때 증조할머니께서 저를 업고 다니시면서 너는 벽진 이가이고, 대장군 자손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총언 시조공께서는 신라 화랑도 출신의 장군이신줄 알았으나 지역의 호족 출신이셨습니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시조공이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서슬퍼런 칼과 활을 잘 쏘는 무장 출신의 시조공인줄 알았으나 지방에서 막강한 권세를 가졌던 호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가 시조공께 벽진장군이라고 작위를 내린 것을 보면, 군사분야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셨던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봄을 시샘하는 늦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학원 배상.


사단법인 노촌기념사업회 / 경상북도 김천시 하리안길 19-6(양천동 830) / E-Mail: nowon_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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