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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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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원 댓글 0건 조회 3,565회 작성일 21-08-0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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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학원: 35세, 강원대학교명예교수 ,이학박사

내가 사용했던 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게 빈번하게 썼던 말이 “아버지”라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는 이 “아버지”와 “어머니”란 말이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 문화를 발전시키며 지탱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반석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 중에서도 “아버지”라는 말이 갖는 무게와 위치는 컴퓨터의 하드웨어(hardware)와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아버지란 말을 늘 써왔고, 지금도 내가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상은 나 자신이 이 아버지란 말의 어원도 잘 몰랐고, 그 의미도 잘 몰랐다. 또한 아버지란 말이 갖는 올바른 개념이 미성숙 상태로 남아 있었고, 아버지의 올바른 행동과 태도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구현 되어야 옳은 것인지도 잘 모르는 채, 오늘날 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아버지”라는 말 보다 “어머니”라는 말의 위세가 더 막강해져 가는 것 같고, “어머니”라는 말 보다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말의 위세가 더욱 기성을 부리는 세태 같아서 아쉬움이 있다.
 
우리말의 “아버지”란 말은 원래 성인이 된 남자 또는 완성된 남자를 의미한다. 원래 아비(夫)란 말이 아버지(父)가 된 것이다. 지금도 연세 많으신 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는 나이 많은 아들을 부를 때 “아비야” 혹은 “애비야”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자식을 둔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자기 남편을 가리킬 때도 “아비”란 말을 쓰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말 할 때도 “아비” 혹은 “애비”라는 말을 쓰고 있다.

북동시베리아에 살던 우리 조상 일부가 얼음이 언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해 가서 인디언이 되었다. 이 인디언들 중에 미국 남서부 아리조나주나 뉴멕시코주 등지에 자리 잡은 아파치(Apache)족이 있다. 이 인디언들을 지칭하는 “아파치”라는 말이 우리말의 아버지(아파치: 우리말의 아버지란 발음과 매우 비슷함)를 의미하고, 우리 민족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는 거란 창건자인 “야율 아보기”라는 이름도 우리말로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거란 말 ‘야율’은 우리말의 “우리”란 뜻이고, ‘아보기’라는 말은 우리말의 “아버지” 란 의미의 말이다.
 
우리가 아버지란 말을 알고 쓰고 있던지, 모르고 쓰고 있었던지 간에  “아버지”란 말의 어원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에 전파되어 유사한 발음과 같은 내용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버지란 말이 “알받이” 혹은 “알보따리”라는 의미로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정액보따리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아버지라는 말은 자기를 낳아준 성인이 된 남자, 또는 완성된 인격체의 남자를 의미하며, 내 생명의 영원성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p.524.)에서 아버지를 의미하는 부부(父部)의 해설을 읽어보면, 아버지가 의미하고 있는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아버지란 말의 개념과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 주(周)나라 전서에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비부(父) 글자 모양이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양’ 이다. 한자는 상형문자(象形文字) 이고, 뜻글자 이다.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는 이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지팡이로 이 세상을 더듬어 가며 가족을 안전하게 올바르게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의미를 형상화 하여 만든 글자가 바로 이 아비 부(父) 자라는 것이다.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고, 가솔을 함께 인솔하며, 앞에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지팡이를 들어 방향을 가리키고, 따라가며, 부축하기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아비 부(父) 글자 모양은 배를 저어가는 노(櫓) 모양으로 발전한다. 노가 무엇인가? 물을 헤쳐 배를 나아가게 하는 기구가 아닌가. 그 물(水)이 뇌성벽력과 폭풍우 치는 대양이건,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이건 간에, 목적한 곳으로 가려면 이 노를 저어 바른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목적한 곳에 닿을 수 있다. 즉 아버지는 한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배의 노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야 하며, 가족이 배 안에서 굶주리지 않게 충분히 먹을 것도 장만하고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원 이듯, 아버지는 자식과 가족들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좀 더 세월이 지나면, 아비 부(父)의 글자 모양은 도끼와 창을 기대어 세워 놓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발전한다. 도끼와 창이 아버지를 의미하는 글자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는가? 아버지는 이 도끼와 창으로 짐승을 잡아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즉 도끼와 창을 휘둘러 사나운 짐승을 잡아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 아버지란 뜻이다.

영어의 ‘Father’를 우리말로는 아버지라고 번역한다. 이 뜻 외에 지도자(指導者), 창설자(創設者), 시조(始祖), 신부(神父)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 ‘Father’란 단어의 어원은 원래 라틴어의 ‘Pater(: Patr)’에서 유래했다. 이 ‘Pater’란 라틴어 어원은 “팔을 갈퀴모양으로 앞으로 뻗어 보호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란 단어의 의미는 동서고금의 시공간(時空間)을 뛰어 넘어 그 뜻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는 가족을 먹이고, 보호하고, 지도하며, 이끌어 나가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밝은 지혜와 용기가 절실히 요구되는 막중한 위치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머니를 의미하는 글자 어미 모(母) 자를 살펴보자. 비스듬한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가슴과 젖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다리꼴 안의 까만 점 두 개는 우리들의 생명의 원천이었던 어머니 젖꼭지를 나타낸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원천이며 무한한 사랑의 샘터인 젖꼭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죽을 때 까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과 일상생활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자식들의 삶과 인생에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부모 중에서도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이 바르면 자식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식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보고 듣는 대로 배우며 행한다. “부모는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겐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가족의 사랑에 기대어 산다. 그 사랑의 바탕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함께하지 못할 때 가정의 안식(安息)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더욱 가족의 사랑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였던 묵자(墨子)는 친구와 교육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푸른색에 물들면 파래지고, 누런색에 물들면 노래진다”고 하였다. 부모가 파란색의 인생을 살아가면 자식도 부모와 흡사한 파란색의 인생을 닮아가고, 노란색 인생을 살아가면 자식도 노란색의 인생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기 마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바람직한 아버지란, 올바른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세상을 헤쳐 나가고, 가족이 편히 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 나이 벌써 일흔 여덟이 되었다. 고려장(高麗葬) 나이가 이미 여덟 살이나 지난 것이다. 내가  살아 온 이 긴 세월이 자식과 가족들에게 자랑이 될 수 없음을 칠십이 넘어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으니, 내 철남이 왜 이렇게 더딘지 모르겠다. 내 출생과 성장과정과 사회활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같이 살아오면서 느꼈던 객관적인 평가와 인식이 과연 어떤 것일까?

 매우 궁금하고, 또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좋은 아버지와 훌륭한 남편이 되기 위해 좀 더 일찍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뒤돌아보니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고 지금 새삼스럽게 무엇을 새로 계획하고 실행하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냥 평소 내가 살아온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요즘의 내 형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젊은 독자님들께서는 저와 같은 회한(悔恨)을 참고로 하여, 결혼 초기부터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알뜰살뜰 훌륭한 아버지 프로젝트를 만들어 훌륭한 가문(家門)을 만들어 일생동안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내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십팔번은 “달 타령”이었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은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아버지가 14살 되던 해에 42살의 아버지인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종신형 같은 가난을 물려받은 17살의 큰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바로 그 해, 대를 이은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한 용단을 내려 홀홀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 가셨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 삼남매의 생계를 도맡은 14살의 내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어린 나이에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달픈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 고생을 어떻게 필설로써 다 나타 낼 수 있겠는가. 세수(世壽) 여든 아홉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보름 전에 내가 할머니의 손톱 발톱을 깎아 드리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나를 바로 쳐다보시며 느닷없이 “한호(漢鎬: 내 아버지의 字)가 효자다”라고 세 번이나 반복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마흔 두 살의 남편을 잃은 후, 자식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장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동안, 열네 살의 어린 둘째 아들이었던 내 아버지가 가장 노릇을 하며 같이 고생하였던 것을 할머니는 한평생 마음에 새겨 두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버지의 소원은 아주 소박하고 간단했다. ‘달타령’의 가사처럼 초가삼간(草家三間)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시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시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소원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셨으니, 한평생 이루지 못한 꿈을 이 ‘달타령’으로 마음을 달래 보시려고 이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 후 당신의 가정을 이루시면서 당신이 받아보지 못하셨던 아버지 정(情)을 자식인 나에게 베풀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며 온갖 궂은일을 다 하셨다. 아버지는 한 평생 새벽 4시면 기침을 하셨다. 이른 아침, 오전, 오후 하루 동안에 하시는 일이 보통 사람이 삼일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초인과 같은 삶을 사셨다. 당신께서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할아버지께서 주창하신 민생(民生)을 위한 민본론(民本論) 내용을 접하신 일이 없으셨지만, 근(槿: 부지런 함)과 검(儉: 검소함)과 예(豫: 미리 예비함)를 삶의 신조로 정해 놓고 일상생활에서 몸소 실천하시며, 가난을 벗어나시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셨다. 그러면서도 근․검․예의 생활을 당신 몸소 실천하시며, 오남삼녀(五男三女) 자식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훈육하였다.

내가 고향의 구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에 합격하자, 아버지의 살림살이 형편을 잘 아시는 집안어른들이  공부 시키려는 아버지를 말리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자식을 가르쳐야한다는 단호한 생각을 꺾지 않으셨다. 그렇게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에 다녔던 6년 동안 내가 납부해야할 학비나 생활비를 단 하루도 늦게 주시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고맙고 감사했다.
 
1953년경, 내 고향 경남 고성군 구만면 낙동에서 중학교가 있던 진주(晉州)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 집에서 진주에 오가는 일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진주 가는 기차를 타야했다. 별만 총총한 컴컴한 새벽 두 시 쯤 집에서 나와, 식량과 반찬 항아리를 지게에 지신 아버지 뒤를 따라 30여리를 걸어가면, 그 옛날 잔인한 산 도둑들이 많이 출몰했다던 급경사의 험한 한골재를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30여리의 험한 산길을 더 걸어가야만 진주 가는 경전선 반성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13살 아들이 캄캄한 밤에 산길을 걸으며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 산길을 가노라면 가끔 ‘부스럭’하고 산짐승이 뛰쳐나가는 소리가 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크게 헛기침을 하시곤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옆에 계서도 간이 콩알 만해 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나를 아버지 앞에서 걸어가게 하곤 하였다.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조이며 무서워하면서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섭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머리끝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것 같다.

무거운 짐을 지셨던 아버지와 내가 네 다섯 시간이나 걸려 반성역에 거의 다 다르면, 기차가 먼저 알고 역으로 막 들어오는 것이다. 짐을 지신 아버지와 내가 뛰어 가서 가까스로 기차 위로 양식과 반찬 항아리를 거의 다 실어가면, 가차가 슬슬 진주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짐을 실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싶어 아버지를 쳐다보면, 아버지는 벌써 역을 출발한 기차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작별할 시간도 없이,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인사말씀을 드릴 틈도 주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달려가는 기차가 한없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차에서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아버지를 향해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아버지도 한참 동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서 계시다가 발걸음을 돌리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불효자식 이다. 그 험한 산 고개를 등짐을 지고 넘어오신 아버지께 기차가 떠나기 전 재빠르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도 옆에서 손을 잡아드리며 감사하다는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이 일이 자식으로서 얼마나 큰 불효였던가를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으니, 아직도 내 모자람과 불효가 이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있다. 내가 죽어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뵙게 되면, 이 일을 제일 먼저 사과드리고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다.
 
1998년 10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문뜩 문뜩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 십팔번인 이 ‘달타령’ 노래를 떠올리며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그리고 해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월(十月)이 오면, 내가 사는 이 춘천의 달 밝은 가을밤은 더더욱 외로운 밤이 된다. 아버지 생전에 내가 봉직하는 대학교의 내 연구실을 둘러보시고,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강대 캠퍼스가 월광(月光)에 물이 들어 있었던 때도 시월이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아버지 기일이 드는 시월이 오면, 서울에 사는 형제남매들이 춘천 우리 집에 모여 기제사를 지낸다. 이 때가 되면 대학 캠퍼스의 느티나무 잎들이 아름답게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가을 달밤에 철새들이 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외롭고 애처로운 철새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시월의 밤이 올 때마다 이 불효자식의 가슴에 그리운 아버지가 가득 찬다.

내 아버지는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진지한 삶의 참 모습을 보여 주셨고, 참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다. 가난하였지만 정직하게 농사를 지으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는 아버지 모습이, 마치 밀레가 그린 “만종”이란 그림속의 농부처럼 보였다. 가을이 익은 들녘에서 추수의 기쁨과 감사와 휴식이 숨 쉬고 있는 이 그림이 밀레의 사상과 그의 철학을 잘 나타낸 스펙타클한 작품 이듯이, 아버지의 농사일과 살아가시는 자세와 매사에 마음 쓰시는 모습을 뵙고 있으면,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 그 자체가 내가 배워야할 윤리도덕 이었으며, 철학 이었고, 위대한 사상을 갈파하시는 선지자 같아 보였다.

내 아버지는 참으로 곤궁한 삶을 사셨지만,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비록 이력서 학력 난에 써넣을 학력이 없으신 어른이셨지만, 대학교수인 나보다도 더 많은 한자를 읽고 쓰셨으며, 한글도 예쁘게 쓰셔서 나의 대학졸업 학력이 아버지 앞에서 여지없이 그 바닥을 들어내어 무안해 졌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있으셔도 공부하는 자식에게 절대로 그 곤궁한 집안 형편을 말씀하시거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내 아버지는 구만면 광덕리 가족공동묘역에 두 어머님과 같이 한 유택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고 있다. 유명한 서예가이고 내 친구인 강원대학교 황재국 박사가 아름다운 예서체로 아버지의 비문을 짓고 썼다.

“공께서는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낙동에서 1916년 10월 9일에 출생하셨다. 평생 지극한 효도를 행하시고 극진히 선영을 돌보시며, 빈한한 중에도 자녀들에게 쏟으신 크고 깊은 자애와 교육, 일가친척 지인들에게 베푸신 덕행은 대인풍도인 군자의 표본이셨다.

공의 함자는 호적에 도선, 족보에는 선한이라 했고, 초년의 자는 한호, 노년에는 명호라 칭하였다. 공은 벽진이씨 시조 이신 고려개국원훈 벽진상장군 총언공의 34세손이시며, 조선조 이조판서 평정공 약동, 병조판서 승원 덕암공, 석경 창랑수공 도유의 후손이시다. 고조부 승화, 증조부 응화, 조부는 우동 이시고, 부 하중공과 모 달성배씨 수분님의 오남일녀 중 차남이셨다. 진양정씨씨 둘용님과 결혼 장남 학원을 낳고, 상배 해주정씨 근두님과 재혼 재원, 평원, 내원, 형원 오남과 완, 향두, 용임 삼녀, 며느님 김숙자, 이정순, 배임자, 김희숙, 사위 김영일, 최호림, 손자 호, 동호, 수진, 수찬, 수인, 손녀 형민, 수랑, 외손자 김학수, 최선, 외손녀 김현숙, 최지영을 두셨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직장암 말기 병세를 아시고도 의연하셨으며, 당신의 인생에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인생을 달관하신 철인의 경지에 이르신 생사관을 갖고 계셨다. 공께서 1998년 10월  15일, 83세 수를 명기로 고향에서 유명을 달리하시니 그 슬픔이 하늘에 닿았다.

해와 달이 빛나고 별빛이 찬란한 광덕리 가족공동묘역에 공의 유택을 마련하고, 진양정씨 부인 묘소를 이장, 부인 두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으니, 자자손손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과 참배가 항상 이어질 것이다. 금번 학원 박사가 내게 공의 비문을 청하매 부덕한 나로서는 사양해야 마땅하나 같은 대학의 동료교수인 정의와 그의 효성에 감복되어 짤막하게 지어 올리는 바이다.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니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 할지어다. 1998년 10월 15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평해인 황재국 삼가 짓고 쓰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서울대학교총동문회 이사
                                                                                      강원도교원총연합회 대의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연구교수
                                                                                      황조근정훈장(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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