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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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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원 댓글 0건 조회 3,815회 작성일 20-11-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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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의 사랑
                     
                              이학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증조할머니는 등에 업힌 어린 증손자와 되도록이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려 애를 쓰며, 마을 골목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원(源)아! 아직도 배가 많이 고프재?”, “응, 할매.”, “ 저 건너 웃 동네 고지기 집에 한 번 가보자.”, “그런데, 원아! 이 할매가 우리 원이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대 꼭 들어줄끼재?”, “뭐꼬? 할매.”, “우리 원이가 쪼깨만 더 크면, 할매가 샌지거리(상여집 근처에 있는 길 이름)에 있는 생이(상여)를 타고 높은 산에 올라갈 일이 생길 끼다. 그라모 우리 원이가 할매가 타고 가는 생이 뒤를 꼭따라 올끼재?”, “응, 할매! 할매가 산에 간다쿠모 꼭 따라 갈끼다.”
 
증조할머니가 상여를 타고 산에 간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천지 분간을 못하던 어린 증손자는 증조할머니 등에 업힌 채, 증조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하며 마을 골목길에 업혀 다녔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갓 서른의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서럽고 힘든 삶을 한평생 살아오셨던 증조할머니께서는, 어미 없이 업어 키우는 이 불쌍한 증손자가 좀 더 크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생무상’이란 주제의 서사시(敍事詩)를 당신의 등에 업힌 어린 증손자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증조할머니의 한 맺힌 삶과 상처 깊은 서글픈 마음을 등에 업힌 철부지 어린 증손자가 어떻게  헤아리고 알아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낙엽 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에게나, 저 멀리 산 위의 파란 하늘에 정처 없이 흘러가는 흰 구름에게나 들려주어야할 이야기였는데, 차라리 등에 업힌 가까운 어린 증손자에게 들려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내가 태어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고부간(姑婦間)에 쌍과부(雙寡婦)이셨던 증조할머니(曾祖母)와 할머니(祖母) 두 분과 같이 한 방에서 지내며 자랐습니다. 두 분 할머니께서는 첫 증손자이고, 첫 손자였던 나를 밤낮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셨고, 귀여워 해주시며, 사랑해주셨습니다. 특히 증조할머니께서는 항상 자애롭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부드럽고 자상했던 보살핌과 한없는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나는 증조할머니의 그 따뜻했던 사랑과 보살핌을 평생 동안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나이 팔십이 다 되도록,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늘 증조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웃음 띤 자애로운 얼굴이 순간순간마다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학교수로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내 일신상에 일어났던 수많은 어려운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 마다, 증조할머니를 추억하고, 참고, 견디고, 그리워하며 눈물을 머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증조할머니께서 늘 내 옆에 살아 계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증조할머니는 내 삶과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의 자랑스러운 할머니이셨습니다.

증조할머니는 갓 시집온 스무 살의 손부(孫婦)인 내 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고 죽자, 생후 9개월 밖에 안 된 이 불쌍한 첫 증손자를 등에 업고, 150여 호의 농가가 모여 사는 낙동(洛洞) 마을의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동네 젖을 얻어 먹여 키웠습니다. 그리고 증조할머니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천자문(千字文)의 조기교육을 통하여, 공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쉽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셨고, 공부하는 목적도 방법도 분명하게 일러주셨습니다. 증조할머니께서 계획 하고 실천하였던 조기교육 계획이나 교육과정, 교육방법, 교육목적, 학습 환경 같은 내용 설정과 적절한 실천 실행이 최근 교육학 이론이나 학습이론에 비해서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증조할머니의 이런 지극한 사랑과 훌륭했던 조기교육 덕분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가며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두 분의 자애 로운 보살핌과 따뜻한 사랑으로,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흔히 겪는다는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것을 전연 모르고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어머니 존재 자체를 잘 알지 못한 채,  유년기를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한 방에서 같이 지내며, 잘 키워주신 두 분 할머니의 큰 자애와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4월 20일(음력)에, 태산 같이 믿고 의지하며 따랐던 증조할머니께서 세수(世壽) 여든여덟 연세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평소 한 번도 편찮아 누운 적이 없으셨는데, 증조할머니께서 위중하니 지금 빨리 큰 집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놀라서 달려갔을 때는, 증조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운 시각이었습니다. 증조할머니께서 거처하시던 큰 방에 가득 모여 앉은 집안 어른들께서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증조할머니가 누워계시는 바로 옆에 앉게 하였습니다. 방 안에 있는 아이는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시던 증조할머니의 둘째 아드님이신 당산(堂山) 종조할아버지께서 “원아, 할매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할매!, 할매!’하고 불러보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가족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던 증조할머니께서는 내가 증조할머니 옆 가까이 다가가서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큰 소리로 ‘할매!, 할매!’를 수십 번이나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눈을 감고 똑 바로 누워계셨던 증조할머니께서 ‘할매!, 할매!, 할매!’ 하며 큰 소리로 부를 때마다, 들릴까 말까하는 아주 가냘프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와!, 와!, 와! ” 하시며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울면서 ‘할매!’를 수십 번도 더 불러 보았습니다. 어른들은 지금 증조할머니의 기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며, ‘할매!’를 부르며 울고 있는 나를 말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조용히 눈을 감으신 채 ‘와! 와! 와!’ 하시던 증조할머니의 아주 작은 음성이 영영 들리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증조할머니께서 이승에 남겨진 이 불쌍한 증손자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시고 남겨주신 것이 『‘할매!’와 ‘와!’』란 이야기였습니다. 증손자가 증조할머니를 부르던 ‘할매!’라는 외침은 사랑하는 증조할머니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해야 했던, 마음 아픈 증손자의 처절한 몸부림 같은 울부짖음 이었고, 증조할머니가 증손자 부름에 대답하신 ‘와!’란 음성은 아주 가냘프고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신 음성이었지만, 증조할머니가 사랑하는 증손자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의 불기둥 같은 음성이라 여름철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던 증조할머니의 마지막 음성의 아주 긴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증조할머니와 증손자가 나누었던 『‘할매!’와 ‘와!’』란 마지막 이별 이야기는 증손자가 살았던 팔십 평생 내내, 한 시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가슴 저미고 슬픈 이야기가 되어 오래도록, 오래도록 이 증손자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증조할머니 등에 업혀 다닐 때 약속한대로, 큰 집 앞 골목에서 출발한 증조할머니 상여를 따라 ‘할매!, 할매!’를 부르며, 울면서 산으로 뒤따라갔습니다. 증조할머니의 별세는 아홉 살이던 나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너무나 크나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안 계시는 내 세상이 너무나 쓸쓸하고 외롭게만 느껴졌습니다. 마음을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나는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혼자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정든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사는 가정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가족의 존재를 처음으로 절실히 느끼고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도 있었습니다. 증조할머니께서 어린 증손자인 나를 등에 업고 다니시면서, 늘 빌어주시고 소원하셨던 말씀을 마음에 꼭 새기고 기억했다가, 반드시 실행하여 증조할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증손자가 되어야겠다는 대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증조할머니께서 틈만 나면 등에 업힌 나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먼 훗날 하늘나라에 가시더라도 이 못난 증손자를 더욱더 사랑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나라에서 항상 내려다보시며, 이 증손자가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따라 다니시며, 도와주시겠다는 약속 말씀도 하셨습니다. 자주 눈물을 훔치시며, 동네 젖을 얻어 먹여 키워주신 증조할머니의 그 크신 사랑을 이 부족한 증손자가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 증조할머니는 지금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나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3대에 걸친 선대 할아버지들께서 모두 30대, 40대 초반 젊은 연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진 집안 살림을 떠맡으신 증조할머니께서는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셨습니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해(1941년, 일제 식민지 말기)에 일흔아홉의 고령이셨지만, 키가 훤칠하게 크신데다 체구도 크시고 성품이 걸걸하시어 일가들과 동네에서는 힘 센 여장부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증조할머니(79세), 할머니(48세), 아버지(25세), 어머니(20세), 막내 삼촌(16세), 막내 고모(12세), 나를 합하여 모두 일곱 식구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에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슬프고 눈물겨운 이야기 하나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며 자손들의 나태와 게으름을 경계하고, 근면과 성실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백부님께서 일본으로 떠나시기 몇 해 전, 밭에 거름을 주고 집으로 들어오시던 길에, 앞집 부잣집 대문간에 걸터앉아 그 집 안쪽을 바라보며 음식냄새를 맡고 있는 어린 막내 여동생(필자의 고모)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게를 진채 철부지 어린 여동생을 안고 집으로 들어오려고 한 발자국을 떼어놓는 순간, 배가 몹시 고팠던 어린 여동생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철부지 막내 여동생을 안아 달래며 집으로 들어오시던 백부님께서도 여동생과 같이 많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한 백부님께서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 배고파 울며 크는 불쌍한 어린 여동생을 가슴에 꼭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의 주제가 가슴 아픈 ‘가난’ 이였습니다.

다섯 살 어린애가 배가 고파 남의 집 대문간에 걸터앉아 음식 냄새를 맡으며 허기를 채우려했을 정도로 구제가 불가능한 극심한 가난이었으면, 그 가난이 누구의 탓이었겠습니까? 그 집안, 그 사회, 그 나라가 만들어낸 가장 큰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니었겠습니까? 비록 근세 구한말의 무질서하고 불안했던 사회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경제적 수탈이 극심했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있었던 우리 집안 이야기라 하지만, 불안한 사회에서 소외되고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에 허덕이던 불쌍한 사람들이 어찌 우리 집안에서만 있었던 일이었겠습니까?
 
4대(四代)를 이어오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장손(長孫)이던 백부님(18세)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목돈이 필요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밀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가셨습니다. 셋째 숙부님, 넷째 숙부님도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차남이시던 아버지는 고향 집에 남아, 두 분 할머니를 봉양(奉養)하며, 온 가족들을 부양(扶養)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갑자기 떠맡게 되었습니다.
 

내 어머니가 열아홉에 시집와 스무 살에 나를 낳고, 스무 한 살에 돌아가시자, 증조할머니께서는 어미를 찾아 울며 보채는 불쌍한 생후 9개월의 어린 증손자를 어머니 대신 업어주고, 뉘이고, 토닥이고, 어르시며, 잠재워 키워주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 동네 골목골목을, 이 집 저 집으로, 젖먹이가 있는 동네 아낙네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젖동냥을 하여 나를 키워주셨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말기, 경제적 착취가 극심했던 당시에 세끼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했던 내 고향 동네 어머니들이, 당신이 낳은 아이들에게도 젖을 풍족하게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 남의 아이에게 까지 먹일 젖이 어디 남아 있었겠습니까? 얻어먹은 젖의 양이 차지 않아 아직도 배고파 우는 증손자를 업고 골목길을 되돌아 나오실 때면, 자주 소리 죽여 우시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증조할머니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증조할머니께서 등에 업힌 어린 증손자에게 맨 먼저 가르친 주신 것이 집안 내력이었습니다.  “원아! 네 성은 벽진 이가다. 할매 따라 큰 소리로 따라 해봐라, ‘나는 벽진 이가다’.” 나는 증조할머니 등에 업혀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 말씀을 따라 복창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내 눈을 똑 바로 보시며 “네 본은 자두 영산 이고, 청백리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덧붙여 말씀을 하시곤 하였습니다. ‘벽진 이가’와 ‘청백리 자손’이란 증조할머니의 쟁쟁한 목소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내 본관(本貫)은 경북 성주군 벽진(碧珍)이었고, 내 고향 경남 고성(固城)으로 처음 오신 입향조(入鄕祖) 이기민(李基敏) 9代祖 할아버지께서 영산(榮山: 경남 창녕군 길곡면 아동)에서 오신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백리(淸白吏) 자손’의 청백리 주인공은 나의 18대조 할아버지이신 조선시대의 평정공(平靖公)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1416~1493년) 할아버지를 일컫는 말씀이었습니다.

평정공 할아버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 관료(官僚)로서 널리 알려진 자랑스러운 우리 집안 할아버지입니다. 144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145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제주목사(濟州牧使, 1470년, 성종 1년)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1474년, 성종 5년), 사간원 대사간(1477년, 성종 8년), 천추사, 경주부윤(1478년), 이조참판(1487년), 한성부좌윤, 전라도 관찰사(1489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의 벼슬을 지내셨습니다. 벼슬을 하시는 동안 휘하(麾下) 관료들과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청렴결백하여 나라에서 종2품 이상의 관료들에게만 주었던 청백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새로 임명되는 검사(檢事)들의 연수교재에 평정공 할아버지의 청백리 행적(行蹟)이 소개되어, 우리 후손들 모두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쓰신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노촌 할아버지의 관료생활 행적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가문, 어느 집안인들 훌륭한 선조들이나 조부모가 계시지 않았겠습니까? 단지 형편에 따라 그런 훌륭한 선조를 찾지 못하거나, 찾지 않는 자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가문의 족보(族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증조할머니께서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동네 젖까지 얻어먹으며, 불쌍하게 크고 있던 이 증손자에게 윗대의 훌륭한 할아버지를 내 세워 그 행적을 알려줌으로써, 이 부족한 증손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긍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심한 마음을 써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내 증조할머니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내 증조할머니의 존함이 이연동(李蓮洞, 1862년 1월15일~1950년 4월 20일, 향년 88세)이십니다. 증조할머니께서는 지금으로부터 158년(2020년 기준) 전, 경남 고성군 구만면 연동(蓮洞)에서 출생하셨는데, 태어나신 동네 이름인 연동(蓮洞)이라는 지명(地名)이 증조할머니의 존함으로 호적등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조할머니의 본관(本貫)은 함안 이씨이고, 선친 이갑규(李甲奎, 족보에는 채규:彩奎라고 기록되어 있음)씨와 모친 박월이(朴月伊 )씨의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같은 고향, 같은 면(面)인 낙동(洛洞) 마을의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셔서 슬하에 2남1녀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시집을 오신 후, 선대 시절에 있었던 우우통이라고 불렀던 동학난(동학운동)과 경제적 착취가 극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시기를 지내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져 불편하기만 했던 가난을 만나고, 가슴 아팠던 어미죽은 증손자를 만나게 되어,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이제 곧 하늘나라의 내 증조할머니를 뵈려 갈 채비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증조할머니! 여태까지 증조할머니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보살펴 도와주신 덕택으로 여든 살이 되도록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부족한 증손자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뵐 때까지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천상의 행복을 오래 오래 누리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증조할머니! 감사합니다.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서울대학교총동문회 이사
                                                                                      강원도교원총연합회 대의원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연구교수
                                                                                      황조근정훈장(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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