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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느 청백리 자손이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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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원 댓글 0건 조회 3,821회 작성일 20-02-2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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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느 청백리 자손이  남긴  유산


                                          金川 李鶴源: 35세,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학박사
                                                                  한국DMZ교육연구소 소장

 
1998년 12월 21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직장암 진단 결과를 통고 받은 여든 두 살의 가난한 아버지(34세, 字 漢鎬, 李善翰, 주민등록 李道善)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암세포가 간과 폐에 까지 전이되어 생존 가능 기간이 3개월 밖에 없다고 한 주치의 말을 딸들로 부터 자세히 전해 들으신 후, 자식들을 병상으로 불러 모아 놓고 “내 인생에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앞에 놓인 죽음을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계셨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인격을 도야한다고 한들 아버지처럼 저렇게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자리를 지켜 섰던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딸들은 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 작은 소리로 통곡을 하였다.

임종 3개월 정도를 남겨두었던 1999년 추석 때, 아들 딸 들이 고향집에 다 모였다. 어머님을 당신의 옆자리에 앉으시게 하셨다. 그런 후 자식들에게 유언을 겸한 재산 상속을 하셨다.

어머님에겐 집 뒤 텃밭 500평 중 300평을 상속하셨다. 현금과 같은 땅이라고 하시면서, 만약 어머니께서 연로하시어 병환이 나시면, 이 땅을 팔아 병 치료와 병간호 비용으로 쓰라는 말씀을 하셨다. 장남인 나에게는 가뭄이 오래 계속되더라도 벼농사 짓는데 물 걱정이 없는 상답 논 600평을 주시면서, 당신의 제후 답(제후 답: 제사를 지내는데 드는 경비 일체를 이 논에서 생산되는 쌀을 팔아 감당하게 하는 논)이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아들에겐 집과 밭을 포함하여 1,000여 평의 전답, 셋째 아들에겐 1,200여 평의 논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아들에게는 좀 적게, 당신이 생각하시기에 형편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아들에게는 좀 많이 나누어 주셨다. 이미 시집 간 장녀와 차녀에겐 유산이 전연 없었고, 시집 못간 막내딸에겐 서울 대우엔지니어링 비서실에 근무할 당시 고향 아버지께 사드린 논을 도로 내 놓으시며, 막내 딸 몫으로 정하셨다. 그 논으로 시집 갈 때 팔아서 혼수 준비에 쓰라고 당부를 하셨다. 덧붙인 말씀은, 막내딸이 돈을 보내 고향에 논을 살 당시 당신께서도 돈을 좀 보태 논을 구입하였다고 하셨다. 가난하셨던 아버지는 논을 1,000평이나 사준 막내딸이 고맙다고 늘 자랑을 하셨다.

아버지 말씀이 끝났다. 아들, 며느리,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의 말씀에 토를 다는 자식이 없었다. SBS에 근무하는 막내가 유일하게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드렸다. 막내는 집 뒤 텃밭 500평 중 300평은 어머니 몫으로 남기고, 남은 200평만 유산으로 받았다. 맞벌이 부부라 작은 밭 200평을 유산으로 받았는데도 유일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한 평생 가난하게 살아 오시면서도 자식들에게 끝없는 사랑과 헌신을 해 오신
아버지셨는데, 자식들은 병든 아버지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느 자식도 아버지 병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고, 겨우 겨우 입 칠을 하고 지내는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죽음이 임박해서 의사를 통하여 아버지 병세를 알게 된 자식들을 자식이라고,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자식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짐승들 보다 못한 자식들이었다고 해야 옳은 일이었다.

그 못난 자식들을 자식이라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시면서 공부를 시키셨는데도, 어느 자식 하나도 깨우쳐 안 지식으로 아버지의 득병 과정을 눈치 챈 자식이 없었다. 그 못난 자식들이 생각하기로는 그저 아버지라는 존재는 늙어서도 안 되고, 병들어도 안 되고, 머리 모발이 하얗게 세어도 안 되는, 죽을 때 까지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 센 장사로 남아 있으면서, 자식들에게 무한 필을 해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자식들의 눈치를 챈 아버지는, 당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당신이 가진 작은 땅이라도 팔아 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자식들에게 병든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 까지도 그 못난 자식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땅이라도 남기시려고 안간 힘을 다하시며 아픈 병을 숨기신 채 참고 또 참으셨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고 난 후, 숨을 크게 쉬시고 아주 편안한 얼굴이 되셨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아버지의 남은 여생이 3개월 밖에 안 된다던 주치의 판단과는 달리, 8개월을 더 견뎌내셨는데 이상한 것은 말기 암을 앓으시면서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조제해준 약을 잡수시며 끝까지 큰 통증을 느끼지 않으셨고, 임종 3일 전 까지도 몸을 움직여 일을 하신 것이다. 고향 동네 어른들은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서울 의사가 잘 못 짚었다고 이야기들을 하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는 도중에 주치의가 하는 말이 “만약 암이 아니었다면, 100세 이상 사실 수 있는 타고 난 건강한 체질을 갖고 계신다.”고 한 말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후회와 아픔을 가져왔다.

세브란스 병원 병상에서 당신의 마지막 생신을 맞았다. 음력 11월 9일, 양력으로는 12월 중순 말이었다. 평소 무엇을 잡수시고 싶다는 말씀을 거의 하시지 않으시던 아버지는 집사람을 보고 시원한 배를 잡수시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다. 집사람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통영 산 굴을 넣어 미역국을 끓이고, 붉은 팥을 넣은 찰밥을 하고, 굴비를 굽고, 시장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배를 구하여 아버지의 생신 상을 병원에서 차려드렸다. 맛있게 잡수시는 아버지를 뵈고 눈물이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시선을 피해 서서 내내 눈물만 흘렸다. 와락 아버지를 껴안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싶은 죄인의 심정이었으나, 아버지의 담담하고 의젓하신 그 모습에 그런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초라한 못난 자식이 되어버렸던 것이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이 되어 가슴에 남는다.

아버지는 다른 자녀들이 방 밖으로 다 나간 다음, 장남인 나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빈소를 차리는 장소, 당신의 장삿날에 수물 한 살에 죽은 내 어머니 산소를 이장하여 같이 묻어주고, 나를 키워주신 지금의 어머님도 돌아가시면 같은 산소 봉군 안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나는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런 걱정을 하시지 마십시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눈물이 흘러 아버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아버지의 삶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아버지의 인생이 너무나 허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시는 아버지께 무슨 말씀을 드려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겠는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아버지의 삶이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느끼시며,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실 수 있으실까? 나는 그 해답을 찾지 못해 크게 당황하였다.

지금 같으면, 아버지 두 손을 잡고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얼굴도 모르는 제가 오직 아버지 사랑으로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늘 크신 사랑으로 지켜봐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께 자랑하고 보답하려는 생각으로 한 평생 최선을 다해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아버지! 이 못난 아들이 효도라는 것을 헌 번 해 볼 수 있도록 그 동안의 불효를 넓으신 마음으로 용서하시고, 조금만 더 오래 사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하고 작별 인사다운 인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버지!” 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께 의논 말씀을 드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뭐꼬?” “아버지께서 만약 돌아가시게 되면 장례를 다 치루고 혹시 남는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아버지 자손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은행에 예치해 놓고, 그 이자 돈으로 해마다 아버지 기일에 한 자손에게 아버지께서 자식들과 자손들을 위하여 어떻게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장학금을 주었으면 합니다. 저도 뒤에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 장학기금에 기금을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정말로 기쁘신 표정으로 “야아야, 정말로 좋은 생각이다.
오냐! 그리하자.” 그렇게 말씀하신 뒤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크게 배우셨던 데가 없었던 어른 이셨는데도 너무나 의젓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남은 짧은 여생을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바라기는 나도 그리고 내 아들도, 손자도 이 장학기금을 키워나가다가 보면 어느 돈 잘 버는 후손이 할아버지의 큰 뜻을 이어받아 사회에 기여하는 큰 장학재단을 만들어 좋은 일을 계속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양력 10월 15일이 아버지 기일이다. 자손들 중에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면 친손, 외손 가리지 않고 할아버지 장학금 50만원을 받는다. 고등학교 입학 장학금(30만원), 중학교 입학(20만원), 초등학교 입학 장학금(10만원)도 지급한다. 공부를 많이 하고 싶으셨으나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할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주는 장학금이라고 이야기 하며, 할아버지 성함이 적힌 장학금을 받아들고 영전에 절을 한다.

가난하셨던 내 아버지가 남겨주신 가장 작은 액수의 부끄러운 장학금이지만 아버지 삶의 마지막 작은 보람이기에 끝까지 정성을 다하고 싶다.

출가외인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아버지의 유산 분배에서 제외된 시집간 여동생 둘 문제는 장남인 내가 아버지 사후에 떠맡아야할 일이었다. 어떻게든 이름을 지어 주어야할 처지에 있었다. 어머니께서 연로하시어 병환이 나면 우리 자식들이 그 비용을 나누어 부담할 수 있을 때, 어머니 앞으로 된 300평의 텃밭 100평씩을 두 여동생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그 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100평씩의 값 500만원씩을 주고, 텃밭 전체 500평을 막내 동생 명의로 만들어 주었다. 이 것으로 아버지의 유산 분배가 완료된 것이다.

큰 재산이나 작은 재산이나 간에 자녀들끼리 고르게 나누어 가져야 만 말이 없다.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산을 갖고 있는 재벌 자녀들이 부모의 상속 재산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일을 여러 번 보아왔다. 같은 형제남매끼리 상속 재산을 놓고 송사를 벌리며 다투는 일은 형제 남매가 아닌 남보다 못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배고프고 가난한 일반 국민들을 진짜로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돈이 피보다 진하고 더 값지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퍼뜨리기 때문이다. 일천한 한국 재벌들의 가치관과 도덕적 해이와 그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먹이를 가운데 놓고 서로 먼저 많이 먹으려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거리는 야생 동물들을 연상하게 한다.

                                                                                                      前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강원대학교 교사교육원 원장
                                                                                                          강원대학교 중등교원연수원 원장
                                                                                                          한국사진지리학회 회장
                                                                                                          한국지리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학술부장
                                                                                                          서울대학교총동문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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