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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 청백리상에 기대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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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철원 댓글 0건 조회 3,941회 작성일 19-07-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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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노촌청백리상 수상자 (좌에서 2 3 4 순으로) 김천소방서 박진숙님, 한국전력기술 류홍재님, 김천시청 여정애님




제1회 노촌 청백리상 
 
오늘 무술년 4월 25일은 김천 출신으로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평정공 노촌 이약동 선생을 추모하는 춘향제(春享祭)를 지내는 날이다. 통상적으로 춘향제는 노인네들 위주로 추진되고 있어서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과는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춘향제 행사 이후에는 김천시 초중고생 즉 꿈나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백리백일장도 개최되므로 흐뭇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날이다.
 
노촌 이약동 선생의 청렴한 청백리 공직생활이 오늘날에 와서 더욱 돋보이는 것은, 최근 온 나라 안이 부정부패 늪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사표가 될 수 있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1818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펴낸 목민심서에는 목민관이 가져야할 덕목과 청백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적혀있다. 목민심서에는 목민관인 수령이 부임 시작부터 부임지를 떠나는 날까지 해야 할 임무와 지켜야할 자세를 적은 일종의 행정지침서인데, 그 중에도 청백리에도 등급이 있다고 적은 내용이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나라에서 주는 봉급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만일 받고 남은 것이 있더라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는 아무것도 지닌 것 없이 숙연히 떠나는 것이 가장 청렴한 관리이고,
봉급 이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받되, 바르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며, 받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것이 중급이고,
전례가 있는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받되, 제가 먼저 전례를 만들지 않고, 남의 것을 착복하지 않는 것이 하급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청백리라는 개념은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가난하게 살아온 관리들이라고 알고 있지만, 다산 선생은 목민관 재임 시의 행적으로 진짜 청렴한 청백리를 가려낸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목민심서 귀장(歸裝)편에서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관리의 행장(行裝)을 보면, 진정으로 청렴한 관리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청백리의 본이 되는 역대의 유명 인물 12명에 대해 돌아갈 때의 구체적인 모습을 예를 들어 적어 놓았다.
 
중국 관리 중에서는 위(魏)나라 배잠(裵潜) 및 명(明)나라 헌예(軒輗) 등 9명을 기록하였고, 조선 관리 중에서는 이약동 등 3명을 기록하였는데 그대로 옮겨 본다.
 
『1. 이약동(李約東)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는데, 돌아갈 배에 오직 채찍 하나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윽고 말하기를, “이것도 섬의 물건이다.” 하고 관루(官樓)에 걸어 두었다. 섬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새 목사가 부임할 때면 항상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채찍이 헐어지니, 고을 사람들이 채찍을 걸어 두었던 곳에 그 흔적을 그려서 사모하는 뜻을 붙이었다.
이약동이 바다를 건널 때에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홀연히 배가 기울고 맴돌아서 위태롭게 되었다. 이약동이 말하기를, “내 행장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막중(幕中) 사람이 나를 속이고 더럽혀서 신명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쳐 주게 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처음에 제주의 장사(將士)들이 공이 일찍이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므로 갑옷 한 벌을 싸서 몰래 배행(陪行)하는 사람에게 주고 바다를 건넌 뒤에 알려드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사실대로 고하였다. 이 약동이 갑옷을 물에 던져버리자, 풍랑이 가라앉고 배가 갔다. 지금까지 그 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한다.
 
2. 이광(李洸)이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가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승진하였다. 영흥을 떠날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서롱(書籠) 등속 뿐이었다. 겨울에 사냥하여 녹피(鹿皮) 수백 장이 있었는데, 관가의 것이 아니었다. 부(府)의 사람들이 행장에 넣기를 청하자, 공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강청한 뒤에야 한 장을 받았다. 길주를 떠날 때에도 또한 그와 같이 하고, 또 영흥에서 받은 녹피는 관가 창고에 남겨두고 갔다.
 
3. 한지(韓祉)가 군수가 되었는데, 구관(舊官)은 쇄마(刷馬)를 으레 18필을 썼다. 한지 자신이 체임될 때에 실을 것이 없어서 2필만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그 대가를 여러 요속(僚屬)에게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감하자니 이름을 얻으려 하는 혐의가 있다.” 하였다. 여러 요속들이 달마(㺚馬)를 많이 샀었는데, 갈려 가게 되자, 주수(主帥)의 명예를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함께 팔아 넘기기를 의논하였다. 그가 듣고 말하기를,
“말을 사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니 어찌 버리랴.” 하고 모두 몰고 가도록 명하였다.』
 
목민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서 과연 다산 선생이 내세우는 진짜 청백리 모습에 가장 근접한 분은 노촌 이약동 선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청백리정신을 기리며 수여하고 있는 청백리상들을 살펴보면, 서울시의 하정(류관) 청백리상과 경기도 광명시의 오리(이원익) 청백리상 그리고 이번에 김천시의 노촌 청백리상이 시행되고 있다. 이중에서 노촌 청백리상은 공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도 수상자를 선정하였기에 더욱 뜻 깊은 제도라고 생각된다.
 
과거 조선의 국가형태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려면 오직 과거급제를 통하여 충성스런 관리가 되어야만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국가경제가 중요시되는 시대이며 충성하는 방법도 다양한 사회이기 때문에 공기업 임직원의 역할이 국가기관 공직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노촌 청백리상 대상에 공기업 임직원이 포함된 것은 시대상황에 부응하는 발상이므로 더욱 기대가 된다.
 
오늘 제1회 노촌 청백리상을 수상하는 김천시의 자랑스러운 공직자 세 분은 그동안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청렴한 자세로서 헌신적으로 국민에게 봉사해온 자랑스러운 공직자들의 표상이다. 수상을 축하하며, 여러분의 노촌 청백리상 수상이 김천시의 공직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공직사회에 새로운 청백정신을 진작시켜 나라가 발전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8. 4. 25
사단법인 노촌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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